본문 바로가기

나름대로 칼럼/in교사, 교사 속마음 디비기

[in교사] ‘개천’에는 ‘용’보다 맑은 물이 필요하다

[in교사] ‘개천’에는 ‘용’보다 맑은 물이 필요하다


 ‘개천에서 용이 나와야’(정광필 칼럼, 2015.1.20일자 한겨레)라는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갈수록 기업인 2세들에게 세습되는 부가 커지고 있으며, 외고와 서울 소재 대학 출신들이 법조인의 주를 이루고 있어 불균형이 심각하다고 했다. 다음은 이 칼럼의 마지막 문장이다.
 ‘대학 당국은 공정성·객관성에 얽매일 게 아니라 성적은 다소 낮지만 역경과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미래의 용들을 더 적극적으로 발굴해야 한다. 대학이 미래의 인재를 키워야지, 사교육업체와 학부모의 욕심에 힘을 실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이 글의 제목이 불편했다. 그동안 우리 교육의 주된 관심사가 ‘용’ 만들기였고, 그것이 모든 파행을 낳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저소득층 자녀들에게도 사회 상층으로 진출할 공평한 기회를 주어야 하고, 이를 위한 사회적 노력은 매우 필요하다. 그러나 입시경쟁교육에 찌든 우리 사회에서 ‘개천에서 용 나와야’한다는 주장은 걱정스럽다. 가뜩이나 한두 마리 ‘용’을 위해 수많은 학생들을 낙오자로 만드는 공고육 현실을 더 암울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여러 학교에서 방과후 영재학급이라는 프로그램이 운영됐다. 수학, 과학, 인문사회 학급 등으로 영재학급을 구성하여 연간 100시간의 수업을 하는 것이다. 한 해의 영재 수업을 마친 뒤 우리 학교에서는, 내년에도 계속할 것인지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정규수업과 학생지도만으로도 버거운데, 연간 100시간의 수업을 더 한다는 것이 교사들에게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생활기록부에 기록되어 입시에 유리하니 이 수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교사들은, 더 많은 선생님들이 함께 수업을 나누어 맡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복잡한 가정사나 개인적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학생들, 때로는 생사의 기로에서 방황하는 학생들을 상담하고 싶지 영재수업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영재교육을 위한 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이 크게 높은 편은 아니라 해도, 학교의 모든 시스템은 자연스럽게 상위권 학생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학부모나 사회의 관심 역시 모조리 그곳을 향하고 있다. 고등학교 교사의 경우 정규 수업이나 학생 지도 외에 온갖 잡무에 찌들어 있으면서 거기에 보태어 영재수업을 하는 것은 분명 과부하가 걸리는 일이다. 꽤 높은 강사료를 받는 이 수업에 정성을 들인다면, 당연히 정규 시간 중 노동의 질은 나빠질 것이 뻔하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평범한 학생들이 떠안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이 예산을 받지 않을 것을 제안했었다.

                                                                                                               
 한 마리 용을 기르기 위해 개천의 모든 자원을 쏟아 붓는 것이 옳을까? 그 용 한 마리가 개천의 물을 송두리째 들이켜고 떠나간 자리에서 평범한 생명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떠나간 용은 정말 다시 돌아와서 개천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주었는가?
 공화국의 학교는 누구를 위한 공간이 되어야 하는가?  모두가 선망하는 대학에 진학하는 상위 10%의 학생들을 위한 공간일까, 아니면 평범한 다수 학생들이 실현가능한 꿈을 꾸며 미래를 준비하는 공간이어야 할까?


                                                  
홍세화는 ‘한국사회 교육 신화 비판’이란 책에서 이렇게 썼다.

                                                         

‘이 땅의 서민대중은 "대한민국 1%의 힘" 따위에 분노할 줄 모르고 "똑똑한 한 놈이 아흔아홉 놈을 먹여 살린다"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정말 똑똑한 한 놈이 아흔아홉 놈을 먹여 살린다면, 분배 정의, 재분배 정의와 조세 정의의 구체적 근거를 대라고 요구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러나 대중은 그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똑똑한 한 놈이 실제로 아흔아홉 놈을 먹여 살린다고 해도, 우리가 과연 그런 사회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 비판 의식도 갖고 있지 못하다.’ -홍세화, <한국사회 교육 신화 비판>( 2007/ 메이데이)

                                                          
  2009년 우리 학교에 부임했던 교장선생님은 ‘학교선택제’에서 비선호학교로 밀려나고 하위 10%의 학생들이 몰려올 것이라며, 모든 교사가 남아서 밤 10시, 12시까지 강제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할 것을 주장했었다. 공부하는 학교라는 인상을 심어주어서 그런 학생들이 우리 학교로 몰려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파렴치하게 솔직하면서도 매우 현실적인 이 주장 앞에서 나는 절망했다. 심정적 반감을 가진 다른 동료들도 교장의 말을 완전히 반대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주장은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그래야 그나마 양심이라도 지킬 수 있다는 슬픈(?) 선택이었다.  그 당시 직원회의에서 읽었던 내 글의 일부이다.

                                

 ‘상위권 학생들이 우리 학교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보충, 자율을 덜해서가 아니라  가난하고  공부 못하는 이 지역 대다수 학생들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빈부격차가 교육격차로 고착된 사회에 살면서, 입시율로 우리는 자존심을 운운합니다.  그러나 정말 자존심 상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사는 교육 전문가라는데 성적 좋은 학생을 뽑아서 대학입시 뒷바라지만 하는 것이 고등학교 교육의 목표일까요?  진짜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그런’ 학생이 몰려올까봐 보충, 자율을 해서 막겠다는 우리의 발상이 아닐까요?

 교육 전문가라면 잘하는 학생, 못하는 학생을 가려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학교에 ‘그런’학생이 많고, 앞으로 더 몰려올 것이라면, ‘그런’ 학생들의 고등학교 시절을 행복하고 보람 있게 해주고, 사회에 나가 양심적인 시민으로 자신감 있게 살아가도록 교육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정과 사회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상담 클리닉, 직업 탐색과 집단 상담 프로그램, 교양 교과 같은 것들을 활성화하는 식으로 말이죠.
                               
 저는 제대로 된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남들이 다 가는 길을 피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애쓰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존경합니다.
 많은 학교와 교사가 교육의 길을 포기하고 ‘장사’의 길을 선택하여 스스로 무덤을 팔 때, 우리는 굳건히 ‘교육’이라는 두 글자를 붙잡았으면 좋겠습니다.
                           
  본래 수업과 학생지도를 제쳐둔 채 ‘보충수업 ․ 자율학습’으로 교사를 묶어두고, 학생을 몰이하려 한다면 우리는 점점 불행해질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 전체로 보면 공멸의 길이기도 합니다.
                            
 대졸자 정규직 취업률이 40%가 안 되고, 정말 똑똑하다 생각했던 졸업생은 등록금 때문에 대학에 입학한 지 1년이 가지 않아 젊은 나이에 신용불량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의지의 한국인’이나 ‘배달의 기수’라는 몇몇 예외적인 꿈을 심어주는 게 아니라 정말 우리 학생들의 현실에 맞는 대안을 모색하고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버리고 싶어 하는 ‘그런’ 학생들은 다름 아닌 대다수 우리 제자들이고, 우리와 늘  함께 하는 이웃임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글을 읽고 나자, 교장은 여유 있는 미소로 답했다.

“좋은 말씀이십니다. 앞으로 그런 학생들이 전혀 안 오지는 않을 테니, 선생님께는 그런 학생들을 맡기겠습니다.”

 참으로 노회하고 자신 있는 승자의 대답이었다.

                                                        
 그 뒤 우리 학교에서는 우수 학생들을 선발해서 따로 학급을 만들었다.  그런데 교육청 지적 사항이 되자, 면접 등으로 선발하던 방식을 바꿔  각종 편법을 사용해서 학급을 나누는 방법을 고수했다. 어떤 식으로든 성적으로 학생들을 나누고 분리하여, 미래의 ‘용’들에게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주려는 노력을 놓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학교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해  ‘사교육걱정 없는 세상’의 보도를 보면, 전국 곳곳의 학교에서 정말 많은 ‘줄 세우기’ 사례가 있었다. 그 가운데는  초등학교에서 성적순으로 급식을 먹게 한 경우도 있어서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성적우수자만이 입사가 가능한 기숙사 운영, 성적순으로 자습실 배정, 편법적 우수반 운영, 상위 10% 학생들 개별 지도 등 무수히 많은 사례가 전국에서 보고되었다.
 
                                                           
 한국인인 한 우리는 누구나 크든 작든 ‘용’에 대한 경외감과 환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개천에서 계속 용들을 길러내고, 모든 개천을 바다로 만드는 것이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일까? 가재도 붕어도 피라미도 없이 용만 남은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동네 개천이 간직한 올망졸망한 이야기들, 소소하지만 따뜻한 일상이 용이 날아오를 하늘의 삶보다 무가치한 걸까?
 그러나 이 비유는 잘못되었다. 기업의 경영인이나 법조인은 ‘용’이고, 동네 미장원의 아줌마나 빵집 아저씨는 ‘용’이 아니기에 대단하지 않다는 생각 자체가 ‘민주 공화국’에는 맞지 않는다. 그리고 공화국의 공교육은 더 이상 이런 속담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믿는다.

20150407글:눈보라(전직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