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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칼럼/in교사, 교사 속마음 디비기

[in 교사] 거지근성! 너의 가난을 증명하라!

[in 교사] 거지근성! 너의 가난을 증명하라!



 10여 년 전부터 고등학교들이 해외로 수학여행을 가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에서도 해외 수학여행이 추진되었다. 여객선과 비행기를 이용한 일본과 중국 여행이었는데, 가격이 꽤 비쌌다.

 먼저 학부모 서명을 받아오는 학생 설문을 했다. 이 지역 특성상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다수 있었다. 그런데 부모님이 무리를 해서라도 수학여행비를 마련해 주었으면 하는 철없는 마음 때문인지, 설문 결과 해외로 가기를 원하는 학생들이 더 많았다.


 나는 처음 해외 수학여행이 논의 될 때부터 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동료 교사들에게 넌지시 물었다.

“우리 학교에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은데, 경비가 비싼 해외 수학여행을 가야 할까요?”

  그러자 한 분이 이렇게 대답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해외로 가보는 게 좋습니다. 그 애들이 평생 해외여행 한 번 하겠어요? 이런 기회에 해봐야지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지만, 나는 속으로 언짢았다. 학생들의 미래에 대한 단정도 거슬렸지만, 자녀에게 잘해주지 못하는 걸 늘 미안해하는 이 지역의 가난한 부모님들이 떠올랐다. 빚내서라도 자식 수학여행은 보내주고 싶은 안타까운 그 마음을 볼모로 잡는 것 같아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평생 한 번 해볼 해외여행이라면, 부모님 경제력에 기대어  단체로 어수선하게 가는 것보다는, 스스로 경비를 마련하고 계획을 짜서 가보는 게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뒤에 생겼다. 학급에서 못 가겠다는 학생들이 10명 정도씩 나왔다. 집안 형편을 뻔히 아는 처지에 그런 부담을 부모님께 지울 수 없다는 철든 학생들이거나, 정말 빚밖에 가진 게 없는 절박한 경우였다.


 회의를 했다. 나는 해외 수학여행을 접자는 의견을 냈다.

 “이 지역에는 가난한 학생들이 많습니다. 돈 때문에 못 가는 학생들이 있다면, 굳이 해외 수학여행을 교육과정에 넣을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가 거두고자 하는 교육적 성과가 무엇입니까?”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학교에서는 재정상 지원 가능한 금액과 외부 장학금, 다른 학부모의 도움으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수학여행비를 충당하고자 했다.  반별로 최대한 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정 안되는 학생들의 명단을 제출하라고 했다.  그 과정에서 한 선생님이 자기 반 학생이 경비가 안 되어 못 가겠다고 했으나 지원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때 그분에게서 ‘거지 근성’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학생은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금 등 여러 혜택을 받고 있는데, 사비로 학원을 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분의 말에 따르면, 학원비 낼 돈이 있으면서 수학여행비를 지원 받으려고 하는 것은 ‘거지 근성’이라 했다.

 각종 통계 자료에 의하면 지난 10여 년간 서울의 고등학생 사교육 참여율은 60% 내외를 유지한다.  공부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라면 사교육을 받는 게 상식처럼 되어 있는 나라에서,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도 학원에 다니고 싶은 그 마음을 ‘사치’라고 할 수 있을까?

  ‘자유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는 출발선의 평등은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전제로 한다. 한국은 전체 교육 예산의 1/3에 달하는 사교육비 규모를 자랑한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누구는 취학 전부터 각종 사교육을 받고, 누구는 고등학생이 되어도 학원 한 번 못 가보는 것이 당연하단 말인가? 우리는 한날 한시에 전국의 고3학생을 시험을 치르고, 시험 보는 동안 비행기 운항도 중지될 만큼 ‘공정 경쟁’ 신화를 가진 나라에 살고 있다. 그런데 비용을 부담할 부모가 없으면 교육과정에 포함된 수학여행도 포기 하라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부모의 경제력의 차이가 교육 격차가 되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선 지양해야 하는 전근대적 유물이다. 그런데, 그것을 막기 위한 ‘교육 복지’를 ‘시혜’ 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어찌 그리도 많은지 놀라울 뿐이었다.

 그 뒤 나는 다른 곳에서 ‘거지 근성’이라는 말을 다시 들었다.

 2011년 오세훈 시장의 무상급식 찬반 주민투표 당시 어느 기업 회장이 사원들에게 보낸 공지 메일에서 ‘무상 급식= 거지근성’이라 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2015년, 한 도의원이 무상급식을 폐지하지 말아달라는 학부모 문자에 "문자 남발하는 돈으로, 아이 기죽이지 마시고 급식비 당당하게 내세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가난을 자신이 선택한 것도 아닌데, 한국의 청소년 중 일부는 평등 교육을 받기 위해서 끝없이 가난을 증명해야 한다.

 실제로 나는 동료교사들이 등록금과 급식비 지원을 받는 학생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등록금도 못 내면서 휴대폰은 비싼 것을 쓰더라’, ‘그 집에 자가용이 있는 것 같다’. 심지어는 ‘가난한 학생이 아침마다 비싼 유제품을 먹는다’고까지 했다. 갖은 지원을 다 받으면서 친구들에게 피자를 산다고도 했다.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나오는 쿠폰으로 친구들에게 피자를 샀던 걸 두고 그런 말이 오간 것이다.

 공부를 곧잘 하고 학원도 다니고 학교에서 활동도 적극적인 학생이 지원을 받으면 더 구설수에 올랐다.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작년에 장학 담당 업무를 맡았다. 생각보다 장학금의 종류가 많았고, 잘만 활용하면 어려운 학생들이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업무를 해나가면서 참 가슴이 아팠다. 학생들이 자신의 가난을 증명하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보통 10장이 넘었고, 구구절절 자기소개서를 쓰거나 추천서에 세밀한 내용이 들어가야 했다. 좀더 서류가 간소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래서 보편적 복지가 필요한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학생들이 받을 수 있는 이런저런 혜택에 대해 업무차원에서 다른 선생님과 대화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듣던 동료 중 하나가 “그런 제도들 때문에 우리 세금이 낭비된다.”는 말을 했다.

 세금 걷어서 4대강 사업이나 자원 외교를 하는 것은 괜찮고,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복지 혜택은 아깝다고 하는 그 입을 보며, ‘그 이웃들의 노동력 없이 당신은 단 하루라도 살 수 있는가. 또 당신이나 당신 자녀라 해서 미래 어느 한 날 어려운 처지 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는가’ 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켜버렸다.

 선택하거나 노력해서 부모를 만들 수 없을진대, 단지 부모 ‘잘못 만난 죄’로 교육의 기회마저 확연히 달라야 한다면, 한국을 민주 평등국가라 할 수 있을까?

 어려서 아버지께 종종 듣던 일화가 있다. 어떤 부자의 아들이 아르바이트로 힘든 허드렛일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물었다고 했다. ‘당신 아버지가 그렇게 부자인데, 왜 이런 일을 하냐’고. 그러자 그가 답했단다. ‘부자는 우리 아버지이지 저는 아닙니다’라고.

 미국의 갑부 워렌 버핏은 돈을 빌려달라는 자녀에게 “돈은 은행에 가서 빌리는 것이지 부모한테 빌리는 것이 아니다. 축구팀에서 아버지가 유명한 센터 포드였다고 그 자리를 아들이 물려받을 수 없지 않으냐.”라 했단다.

  거지 근성이 ‘노력 없이 공짜로 무언가를 누리려는 것’이라면, 진짜 거지 근성은 부모의 재산을 무조건 내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내 자녀가 민주 공화국의 시민으로 살기를 원하는가, 18세기 계급사회에 살기를 원하는가? 공존하는 ‘미래’를 열어줄 것인가, 폐쇄적인 ‘과거’ 속에 가둘 것인가? 

 

20150413 글:눈보라(전직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