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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칼럼/in교사, 교사 속마음 디비기

인성을 ‘인증’하겠다는 '인성교육진흥법'

[in 교사] 인성을 ‘인증’하겠다는 '인성교육진흥법'

지난 해 말 ‘인성교육진흥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안을 대표 발의한 국회 의장은 “대한민국의 백년대계를 위해 교육이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고, 학교 현장에서도 청소년들이 협동심과 배려심 등을 키울 수 있도록, 입시위주지식위주의 교육을 탈피해 다양한 인성교육이 실시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국회의장 외에도 이 법 제정을 추진한 교총, 국회의원들, 혹은 교육부의 인터뷰를 보면, 입시위주의 교육 때문에 인성교육에 소홀했다고 한다. 아마 우리 국민이라면 대부분 그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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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입시 위주의 교육 때문에 인성 교육에 소홀했다면,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나무들이 하나 둘 말라 죽어가고 있는 울창한 숲에 잔뜩 병충해가 든 것을 보고, 숲의 나무들이 병충해 때문에 영양이 없으니 영양을 공급할 법안을 만들면 문제가 해결될까? 숲을 살리려면 당연히 병충해의 원인과 치료법을 연구하고 처방해야 한다.
당연히 ‘왜 입시 위주의 교육을 하면 인성 교육이 소홀해지는지’, 또 ‘우리 교육은 왜 입시 위주가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 뒤에 그에 맞는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국회와 교육부는 인성 교육이 안 되고 있으니 대뜸 법을 만들어서 인성교육을 진흥하겠다고 한다.
고등교육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인과론적 사고의 흔적마저 찾을 길 없는 ‘인성교육진흥법’의 제정이 교사단체인 한국교총과 대한민국 국회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나는 믿을 수가 없다.

게다가 이 법은 각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인성교육 계획을 수립하고 예산을 편성, 집행하고 보고하도록 강제했다. 결국 교육청으로부터 예산을 받고, 인성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를 시행하며 예산을 집행․보고하는 과정은 또 다른 잡무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잡무에 치여 학생들과 교감하며 학생의 인성을 돌볼 틈이 없는 교사들에게 또다른 잡무를 떠안기는 것이 ‘인성 교육’을 위한 일이라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 법에는 ‘인성교육 인증기관’에 대한 항목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에 발맞춰 올해 초에 ‘대전시인성교육범국민실천연합’이 인성교육실천 인증 급수 발급 기관으로 선정됐다. 인성교육 실천 정도에 따라 1급에서 8급까지 급수증을 준다는 것이다.
한편 교육부는 이 법에 따라 대학입시에 인성 평가가 반영되도록 유도하고, 우선 교대와 사범대에 적용할 계획이다. 또 내년부터는 입시에 인성을 반영한 대학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도 추진한다고 한다.

다시 문제의 원인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 교육이 ‘입시 위주’가 된 까닭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어른들, 부모와 교사는 왜 자신의 자녀와 학생을 명문대학에 보내는 것에 사활을 거는가? 한국인이라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명문대 출신들에게 보장되는 ‘고소득의 안정적인 삶’과 명예 때문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 것이다.

 


2011년 <노동경제논집>에 실린 고은미의 논문, ‘1999~ 2008년 한국의 대졸자간 임금격차 변화’에 의하면 학력간 임금 격차 뿐아니라, 대학 서열에 따른 임금 격차까지도 점점 커지는 추세이다. 당연히 인성을 돌볼 수 없는 입시 위주의 교육이 만연한 것은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더라도 교육이 입시 위주가 된 것은 단순히 대학 서열화 때문만은 아니다. ‘공동체 속에 어울리며 행복을 일구는 삶’이 아닌 ‘남보다 많은 물질적 부를 누리고자 하는 삶’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풍토와 행정이 공교육에 만연해 있기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인성 교육이 입시 때문에 뒷전으로 밀리니, 법을 제정해서 인성을 입시에 반영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발상은 한낱 제스처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이 법을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가져올 파행과 도덕적 혼란으로 인해, 멍들대로 멍든 우리 교육이 또 한 번 치명상을 입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왜곡된 인센티브의 폐해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내 친구는 어린 자녀들이 감사 카드를 쓸 때마다 1달러씩 주었다. 아이들이 쓰는 감사 카드를 읽어보면 억지로 썼다는 사실을 대부분 눈치 챌 수 있었다.’라고 하면서 문제점을 지적했다.
‘아이들이 잘못된 교훈을 받아들여 감사카드를 쓰는 일은 돈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노동이자 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좋은 습관은 생기지 않고 보상이 끊어지면 더 이상 감사 카드를 쓰지 않을 것이다. 더욱 심한 경우에는 뇌물이 아이들의 도덕 교육을 변질시켜 감사의 미덕을 배우기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감사 카드를 쓰게 하려고 뇌물을 주는 방법은 단기간에 감사 카드의 수를 증가시킬지는 몰라도, 아이들에게 해당 재화에 대한 잘못된 가치부여 방식을 심어주기 때문에 결국 실패할 것이다.’
인성을 ‘평가’하고 ‘급수’를 매겨 ‘인증’하며, ‘입시’에 반영하겠다는 것은 결국 인성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인성을 계량화, 수치화하며, 인성으로 다시 줄을 세우고, 인성에 대해 물질적 보상을 하겠다는 발상이다.
샌델이 위의 책에서 수차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즉 물질적 보상으로 얻을 수 없는 것들을 돈으로 사려고 할 때 그것은 원래의 가치를 잃게 된다.

인성교육진흥법에 명시된 핵심 가치는 ‘예(禮)·효(孝)·정직·책임·존중·배려·소통·협동’이라고 한다. 이런 것을 평가하고 그에 대한 인센티브를 주기 시작할 때, 이런 가치들은 원래의 의미를 잃을 것이다. 생각해 보자. ‘존중, 배려, 소통, 협동’의 인성을 지닌 학생이라면, 친구들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인성 급수를 잘 받고, 인성 평가에서 우수한 점수를 얻으며, 그를 통해 입시에서 이익을 보려고 할까? 좋은 인성이 점수와 급수로 환산되어 수치화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좋은 인성일 수 없다. 참된 선량함은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는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입시 위주의 교육이 왜 나쁜가? 지식만을 중요시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인성이 나빠지지 않는다. 문학, 사회, 윤리, 과학, 수학과 같은 학생들이 배우는 과목들 속에 담긴 지식은 학생들에게 풍부한 간접경험을 제공하기도 하고, 논리적 사고력과 이해력을 높이기도 한다. 이런 능력은 좋은 인성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된다.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문제되는 것은 ‘지식을 중시한 것’이 아니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입시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 나쁜 것이다. 입시 때문에 교육이 앞장서서 학생들을 경쟁시키고 변별하고, 미래의 물질적 보상을 위해 한 줄로 줄세운 것이 나쁘다.
그런데 인성을 진흥한다면서 똑같은 일을 벌이고 있다. 인성마저도 줄세우는 현실은 비참하다 못해 슬프다. 아 대한민국!

20150227 글: 눈보라(전직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