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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신톡 늬우스/기인 늬우스

[한겨레] 햇빛21단지에서 일어난 일을 디토가 기고했어요.

원문 링크 http://v.media.daum.net/v/20180108181619115


[왜냐면] 동네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 정은주


2018.01.08. 18:16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엄마, 너무 무서워. 우리 협박죄로 잡혀가면 어떡해?” 우리 아파트 단지의 입주자 대표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초등생 아들이 한 말이다. 불합리한 진행으로 일관하다 폐회선언을 한 회장을 향해 내가 항의의 말을 쏟아놓자 대표 중 한명은 ‘지금 협박하는 거냐’고 응수했다.

아파트 경비원의 최저임금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방청객으로 참여했다가 접한 독단적인 회의 진행 방식은 이러했다. 방청객 한명이 발언권을 요청하자 회장이 이를 묵살했고 회의 말미에 다시 발언권 요청을 했을 때는 조용히 하라고 고압적인 명령까지 했다. 그들은 경비원 휴게시간을 1시간 늘리는 꼼수를 동원하여 정부 보조금만큼만 경비원의 임금 인상을 하기로 의결했다. 입주자 대표회의는 말 그대로 입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대의 기관이다. 모두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안건에 대해서 주민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수렴하는 것이 응당 그들이 할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파트 관리 규약에는 입주자 대표회의 때 방청객이 회장의 동의를 얻어 발언할 수 있다는 주민의 권리 조항이 있다. 회장은 이를 자신이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는 하찮은 권리로 가치 저하시킨 것이다.

민주적 토론과 배움의 장을 기대하며 아이를 동반했던 나의 순진한 기대가 무너지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내 소나무 손질을 어떻게 하느냐를 놓고 한 시간 넘게 갑론을박하며 회의 진행을 엿가락 늘이듯 하더니, 핵심 안건의 순서도 즉석에서 바꾸고 주민들에겐 시간이 너무 늦어 발언권을 안 줬다는 말을 해명이라고 내놓았다. 우리 아파트의 상당수 주민은 경비원 최저임금 문제를 놓고 입주민 모임을 만들어 몇달 동안 주민 토론회와 서명받기, 안건 발의, 소식지 배포 등을 자발적으로 해왔다. 입주자 대표회의가 있기 전, 경비원의 최저임금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으리라는 소식을 접하고 우리는 주민들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밤늦은 시간에 아파트 880가구의 우편함에 긴급히 소식지를 넣었다.

그러나 다음날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관리소장이 경비원들에게 지시하여 소식지를 몽땅 걷어간 것이다. 우편함은 개인의 소유물이다. 주민 간의 소통을 위한 소식지에 모임의 주체와 연락처까지 명기되어 있음에도 임의로 수거해 간 것은 절도 행위나 다름없다. 일련의 상황을 겪으며 그들이 주민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얼마나 깜깜이식으로 아파트를 운영해왔는지 알게 됐다.

인근 아파트 중 무인경비 시스템으로 바꾸고 경비원 대량해고를 감행한 곳은 사람 사는 마을 같지 않은 을씨년스러움 탓에 밤길이 섬뜩하다고 한다. 최저임금 보장은 노동에 대해 최소한의 정당한 비용을 지급하자는 것이다. 임금이 오르면 젊은 사람을 고용하지 지금처럼 나이 든 사람들을 누가 경비원으로 고용하겠냐는 말을 서슴지 않는 입주자 대표를 보며 한심한 마음 누를 길 없었다. 지금껏 경비원들의 세심한 손길과 눈길이 아파트 구석구석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주민들은 알고 있다. 노인 노동을 폄하하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단견일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비난받아야 한다.

입주자 대표회의 때 겁먹었던 내 아이는 며칠 후 아파트 도서관에서 만난 회장에게 ‘왜 그때 발언권을 주지 않았어요?’ 하고 당당하게 물었다. 이제 그들을 반면교사 삼아 세상을 다르게 보는 용기를 배운 것이다. 입주자 대표들에게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한 것은 ‘협박’이 아니다. 주민으로서의 권리를 외면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내 아이의 맑은 시선에 담길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앞으로는 눈감지 않겠다는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