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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칼럼/in교사, 교사 속마음 디비기

[in 교사] 아동 폭력, ‘착한 신고제’는 정말 착할까?

 

[in 교사] 아동 폭력, ‘착한 신고제’는 정말 착할까?

 

 새해를 맞이하고 두 달 사이에, 부모의 구타로 자녀가 죽음에 이른 사건이 잇따라 밝혀져 전국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교육부 장관은 큰 책임을 느낀다며, ‘착한 신고제’를 더욱 강화하겠다고 했다. 착한 신고제란 아동학대가 의심되거나 알게 된 사람은 누구나 신고 할 수 있는 제도이다. 경찰 112신고 이외에도 소방119나 보건복지부129에도 신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참혹한 사건들과 ‘착한 신고제’에 대한 보도에 접하며, 나는 답답하고 화가 났다.

 5년 전쯤의 일이다. 학급에 유난히 얼굴이 창백하고 말수가 적은 여학생이 있었다. 상담하다가 학생의 부모가 모두 안 계신 걸 알게 되었다. 오래 전에 헤어진 아버지와는 연락도 되지 않고, 엄마는 한 해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영구 임대 주택에서 살고 있었는데, 기초 생활 수급자로 분류되어 의식주는 해결되었다. 그런데, 학생이 하나 둘 털어놓은 이야기는 매우 심각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고등학생 남매가 살고 있는 집에 외삼촌이 들어왔다. 삼촌은 아이들을 자주 매질했다. 공부하라, 집안일 제대로 하라는 이유였다.

 컴퓨터를 사용해야 하는 과제를 해오지 못하는 아이에게, 나라에서 지원한 컴퓨터가 고장 났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 컴퓨터는 집에 없었다. 삼촌이 무슨 사업을 한다며 자기 사무실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고3인 그 아이 오빠를 수시로 불러내어 사무실에서 잡다한 일을 시켰다. 물론 급여 없는 노동이었다. 그러나 삼촌이 무서워서 주말도 반납하고 따를 뿐이었다.

 삼촌이 무릎 꿇리고 허벅지를 때렸다며, 보여준 학생의 멍을 확인한 나는 무척 고민했다. 그 무렵 친족 성폭력에 대한 재판에서 미성년 피해자를 가해자인 양육자에게 돌려보내는  판결이 있었다. 그만큼 가정 내 폭력에 사회가 개입하는 것을 꺼리고 있기에, 이 문제의 해결은 매우 어렵고 복잡해 보였다.

 상담기관을 통해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복지부 129 상담소에 전화를 했다. 이야기를 꺼내놓자 상담사는 몹시 흥분했다. “여자아이를 삼촌이 매질한단 말이죠?”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추측까지 하면서 빨리 삼촌과 아이를 격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때는 착한 신고제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아동학대 방지 센터에 신고하라고 권했다. 나는 물론 신고는 할 수 있지만, 신고 후에 이런 문제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으면 아이들이 더 피해를 보게 되지나 않을지 하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좀 더 현실적인 대안이 있을지 물었다. 그러자 내가 신고를 망설인다고 생각한 상담사는 “선생님은 신고 의무자이십니다.”라고 강조했다.

 결국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센터에 신고했다. 며칠 후 내가 속한 지역의 아동학대방지센터에서 연락이 오고, 두 명의 근무자가 학교로 찾아 왔다. 그리고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들은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삼촌이 아이를 훈육하기 위해서 한두 대 때릴 수도 있지 않냐?”는 것이었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센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 사회의 가장 흔한 방식이었다. 신고한 사람과 피해자를 설득하여, 사건을 없었던 일로 덮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졸지에 선량한 삼촌을 오해한 나쁜 선생이 되었다. 내가 적극적으로 신고한 것도 아니기에 더욱 기가 막혔다. 상담사는 신고 의무자라 부추겼는데, 정작 센터에서는 신고한 나에게 과민 반응한다고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삼촌이 찾아왔다. 보기에도 우락부락한 삼촌을 마주 대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쫄지 않는 것뿐이었다. 학생이 걱정되었기에 매우 피상적인 대화만 했을 뿐, 강경한 얘기는 할 수 없었다. 그저 ‘담임이 예의 주시하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전해졌기를 바랐을 뿐이다.

 해가 바뀌고 그 학생에게 많이 신경을 쓸 수 없었지만, 내내 그 학생은 나를 안타깝게 하다가 졸업을 했다. 중간에 쉼터 같은 곳을 알아보려고 수소문도 했고, 이모와도 수차례 통화를 하면서 이런저런 노력을 해보았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후 비슷한 사례를 우연히 알게 됐다. 이웃에 살고 있는 한 여학생이 집에 갇혀 아버지에게 맞고 있다는 얘기를, 지인으로부터 들었다. 그 학생은 인터넷으로 만난 이에게 성추행을 당해 경찰 수사를 받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경찰서를 드나들고 있어서 경찰에 신고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아이의 행동거지가 불결했다는 이유로 아빠가 집에 가두고, 말리는 엄마까지 때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며칠째 학교도 나가지 못하고 집에 갇혀서 벌거벗겨진 채 맞는 것을 알게 됐다. 얼굴에 멍이 들고, 안경도 부러진 것을 봤다는 지인의 말에 속이 탔다. 그러나 나는 그저 이웃 아줌마에 불과했기에, 갇혀 있는 아이와 직접 만나 의논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어렵게 알아낸 학교  담임의 연락처로 통화를 시도했다. 통화가 연결되고, 내가 더듬더듬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자 곧바로 수화기 너머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시죠? 그 학생 건은 저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냥 그애 집안일이거니 하고 모른 척해주세요. 그게 제일 낫습니다.”

 모른척해 주라니, 그게 최선이라니…….  그 말과 그때 일들을 떠올리면, 자녀가 부모에게 맞아죽은 사건들이 전혀 놀랍지 않게 느껴진다.

 그래, 최선의 결과로 돌아온 것이 처참한 아이들의  주검이 아니던가? 수많은 모른 척과, 모른 척을 최선으로 알았던 평범한 우리의 믿음 때문에 말이다.

 착한 신고제가 정말로 착해지려면, 견고한 가정의 성벽을 둘러싼 가족 신화를 깨뜨리고, 공동체를 복원해야 한다. 자녀가 그저 부모의 소유물일 뿐이며 공동체가 가정의 울타리를 넘을 수 없다고 믿는 사회에서, 아이들이 제대로 자라기를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가?

 학교 역시 부모의 욕망에 따라 학생을 교육할 뿐인 서비스 기관으로 점점 더 전락하고 있다. 방치된 아이들을 품을 지역 공동체도 없는 시대에, 학교마저 사교육 기관의 가치를 좇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다만 어떤 특수한 가정의 문제이며, 몇몇 부모의 개인적 도덕성 문제이기만 할까? 시들어가는 아이들을  방치하는 사회가, 그 가정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지 않은가?

(글 :눈보라 2016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