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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칼럼/풀소리의 들메길 이야기

유빙이 빙하처럼 흐르는 연미정에 가다

유례를 찾기 힘든 강추위가 열흘 가까지 세상을 꽁공 얼릴 때

나는 날이 조금 풀리는 대로 연미정을 가고 싶었습니다.

임진강이 얼고, 한강이 얼면 밀물과 썰물을 따라 수많은 얼음 조각이 바다로 밀려 내려갑니다.

특히 강추위가 지나고 썰물이 지날 때면 이곳 연미정 앞 조강은 그야말로 유빙의 천지가 되어 마치 거대한 용암처럼, 빙하처럼 유유히 부빙들이 흘러갑니다.

마침 추위가 주춤해진 어제(2016년 1월 26일) 나는 연미정으로 향했습니다.

 

일산 대화에서 97번 버스를 타고 김포 한강로사거리에서 3000번 버스로 갈아타고 강화터미널로 갔습니다.

11시 15분에 도착했는데, 연미정 가는 버스는 12시에나 떠납니다.

마음이 급한 나는 택시를 탔습니다.

왜냐하면 물때를 맞춰야 유빙의 장관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화대교 기준 간조(물이 가장 낮은 때) 시간이 오후 2시 40분이니 그 시간이 가까울수록 물은 줄어들고, 유속은 느려질 것입니다.

 

 

월곶돈대

 

연미정은 월곶돈대 안에 있습니다.

마음이 급한 나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돈대를 오릅니다.

 

 

 

그래도 몇 컷을 찍었네요.

사진 찍을 땐 몰랐는데, 돈대 성벽엔 아침에 흩날린 눈들이 붙어 있습니다.

 

 

연미정에서 바라본 조강의 유빙

 

돈대 성벽으로 달려가 강을 바라보았습니다.

아~ 역시 달려온 보람이 있습니다.

조강을 가득 메운 유빙은 서해바다로 염하로 장엄하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멀리 강 가운데 섬 유도가 보이고, 철책 바로 앞에서 왼쪽으로는 교동도 방향 서해바다로 흐르고, 오른쪽으로는 강화대교 쪽 염하로 흐릅니다.

이곳에서 물길이 나뉘는 모습이 제비꼬리 닮았다고 하여 이곳 정자 이름을 제비 연(燕) 꼬리 미(尾) 자를 써 연미정(燕尾亭)이라고 불렀답니다.

 

 

 

유빙을 실컷 보고서야 연미정을 돌아봤습니다.

날렵한 모습은 여전합니다.

 

 

 

북녘 땅이 보다 잘 보이는 곳으로 갔습니다.

날이 흐려 북녘 땅은 잘 찍히지 않지만, 강 건너 흰 어름띠 있는 부분이 북녘입니다.

 

 

 

 

연미정은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 장군에게 나라에서 내려준 정자라고 합니다.

연미정 너머로는 조강과 염하가 갈리는데, 물이 흘러갈 때 생기는 물결이 제비꼬리를 닮아서 연미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름도 예쁘고, 전망도 예쁘지만, 연미정은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곳은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 청나라(당시는 후금)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곳이기도 하니까요.

연미정 옆에 우뚝 서 있는 500살 도 넘은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아마도 그때의 광경을 기억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 전투가 있을 당시 이곳은 조선군의 후방기지였다고 합니다.

정예병이라고 하지만 2,300여명에 불과한 조선군은 겨우 임시로 설치한 조그마한 목책성인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서울 바로 밑에 있는 조선군을 섬멸하기 위해 일본군은 3만명 이상이 출동합니다.

행주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질 거라는 소식은 순식간에 이곳 후방기지에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2,300명 대 30,000명. 누가 봐도 승패가 뻔한 싸움이었을 겁니다.

이곳 연미정 후방기지에 있는 조선군사들은 누구도 그 뻔한 싸움에 말려들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79세의 노장군 충청수군절도사 정걸 장군이

"나는 살만큼 산 사람이오. 나에게 이곳에 있는 화살을 모두 주시오." 하고는

2척의 배에 화살을 가득 싣고 행주산성을 향했다고 합니다.

정걸 장군이 행주산성에 도착할 즈음에는 조선군은 총포는 물론 화살마저 동이나 투석전으로 겨우 벼티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화살을 가득 실은 보급선이 나타나니 조선군은 사기가 오르고, 일본군은 더 이상 싸울 기력을 잃고 후퇴하였다고 합니다.

 

  연미정 현판

 

 돈대의 포대/ 옛날 대포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옛날 공신 황형장군의 집터였음을 보여주는 비석

 

 

 

뒤돌아 나오면서 연미정을 찍었습니다.

슬픈 사연을 품고 있을 지라도

풍경은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나라가 망할 즈음 당대의 지식인 화남 선생은 나귀 한 마리를 타고 자신의 고향 강화도를 돌면서 시를 썼습니다. 물론 이곳에서도 시를 썼습니다. 바로 위에 있는 시가 화남 선생이 이곳에서 쓴 시입니다.

왕조의 몰락과 함께, 왕조의 수도로 향하던 세금을 실은 수많은 세곡선이 끊겼을 것이고, 바로 그 싯점의 화남 선생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거역하고 싶은 시대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커다란 물결로 다가올 때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황형 장군이 대마도 정벌 때 그곳에서 가져왔다는 시누대가 돈대 주변에 아직도 자라고 있습니다. 화살을 만들 수 있는 대나무라 특별히 심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 돈대 앞에는 포구가 있었을까요. 해안 쪽으로는 이런 성문도 있습니다.

 

 

이곳에 가신다면 돈대 공중화장실 옆에 있는 할머니식당에서 밥을 드시기 바랍니다. 이곳을 지키고 계신 할머니는 미리 밥을 해놓지 않고, 사람이 오거나 주문을 하면 그때서야 냄비밥을 짓습니다. 검은콩이 들어간 강화쌀로 지은 밥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 맛있습니다. 2인 분을 시켰는데도 조기 매운탕과 김치찌개가 나오고, 깔끔한 밑반찬이 나옵니다. 혹시 이곳에서 밥을 드시고 싶으시다면 미리 예약을 해놓는 것도 좋습니다.

 

배고픈 상태에서 밥이 나와서 그런지 너무 기쁜 나머지 사진도 떨렸습니다.

 

 

 

나들길 1코스에서 바라본 조강과 건너편 북녘 땅

 

밥을 먹고 강화나들길 1코스를 따라 강화읍으로 향했습니다. 중간 조망이 좋은 곳에서 햇볕을 받으며 북녘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큰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 아프게 들어왔습니다.

 

 

강화나들길 쉼터였던 들길바람길 자리

 

걷다가 들길바람길 자리를 지나면서 옛 추억을 되살렸습니다. 불과 5년이 지났을 뿐인데, 사람도 떠나고, 쉼터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5년 뒤 우리는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어디에 있을가요.

 

 

 들길바람길의 옛 사진

 

들길바람길에서 바로 오르면 강화성 북문입니다. 높다란 언덕 위에는 강화성 북문이 있습니다. 문밖 사람들은 가까운 시내를 찾길로 돌지 않고 이렇게 걸어다니나 봅니다.

 

 

강화성 북문입니다. 성문의 정교한 돌쌓기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외포리 포구

 

이번 여행은 문화재를 보러간 여행이 아니라 순전히 연미정의 유빙과 바다를 보러 간 거였기에 걷는 중간에 있었던 수많은 문화재는 건너 뛰었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온 외포리 포구에도 유빙이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외포리에 닿았을 땐 썰물에서 밀물로 바뀌는 때였습니다. 갯벌이 드러나고, 오리들이 막 밀려오는 밀물 사이에서 먹이사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멀리 석모도 석포리 포구가 보입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도 좋은데, 오늘은 여기까지 본 것으로 만족하렵니다.

 

혹시 연미정의 유빙을 보시려면 이번 주에 다녀오셔야 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