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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칼럼/풀소리의 들메길 이야기

2018. 6. 9 파주연천 생명평화여행

 

파주 연천 생명 평화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지지난 주 토요일(2018. 06. 09) '통일을 이루는 사람들' 주최로 '파주 연천 생명 평화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오전 948명의 회원을 태운 2대의 버스는 자유로를 거쳐 연천에 있는 숭의전(崇義殿)으로 향했습니다. 숭의전은 고려의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 네 임금을 모신 일종의 종묘입니다. 숭의전은 정전인 숭의전, 역대 명신을 모신 배신청(陪臣廳), 숭의전과 배신청을 수리할 때 신주를 임시로 안치하는 이안청(移安廳), 각종 제기를 보관하고, 음식을 차리는 전사청(典祀廳), 제관들의 의복을 보관하고, 환복(옷을 갈아입음)을 하는 앙암재(仰巖齋)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숭의전에서 원래 제가 해설을 하기로 했었는데, 마이크가 고장 나는 바람에 목청이 좋은 박평수 회장이 해설을 맡았습니다. 박평수 회장님 고맙고 죄송합니다. 암튼 저로선 다행이었죠. 하하.

앙암재에는 태조 왕건의 친필로 정몽주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필적의 사본이 있습니다.

 

 

필적의 내용은 이백의 시() '별동림사승(別東林寺僧)'입니다.

 

東林送客處(동림송객처) 동림사 손님 전송하는 곳에

月出白猿啼(월출백원제) 달이 뜨고 흰 원숭이 우는구나

笑別廬山遠(소별여산원) 웃으며 이별하는 여산의 혜원스님

何煩過虎溪(하번과호계) 어찌 번거롭게 호계를 지나갔는가

 

숭의전에는 3구의 ()’()’로 적어놓았는데, 내가 초서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가 맞는 거 같습니다.

동진(東晉) 때 동림사에는 혜원(慧遠) 스님이라는 고승이 있었습니다. 혜원 스님은 세속에 발을 딛지 않겠다며 여산과 동림사가 있는 호계(虎溪)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유명한 시인이기도 한 도연명(陶淵明)과 도사(道士) 육수정(陸修靜)이 찾아옵니다. 혜원 스님은 두 사람과 이별을 하다 이야기에 빠져서 호계를 벗어났다 합니다. 세 사람은 뒤늦게 호계를 벗어난 걸 알고 한바탕 웃음을 웃었다고 하는데, 이 고사를 후세 사람들은 호계삼소(虎溪三笑)’라고 합니다. 이백의 시는 중국의 명산인 여산(廬山)에 유람 가서 동림사에 들렸을 때 이 고사를 생각하며 쓴 시입니다.

 

 

숭의전에서 잠두봉 전망대를 지나 초대 숭의전사(崇義殿使)인 왕순례 묘를 지나 이웃에 있는 당포성에 들렀습니다.

 

 

당포성은 잘 아시다시피 고구려 성()입니다. 14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성은 제 모습을 잃었지만, 3면의 깎아지른 절벽과 한 면의 높은 성벽이 한눈에 보아도 이곳이 공략하기 힘든 요새임을 알겠습니다. 숭의전 방향으로 당개나루 당포진이 있어 교통의 요지이고, 상류 쪽으로는 얕은 여울이 있어 신라 군사들이 걸어서도 도강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당포성은 이 두 곳을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있습니다. 당포성 가는 길에는 뽕나무마다 잘 익은 오디가 주렁주렁 열려 있어 우리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UN군 화장장을 들렀습니다.

 

 

2년여의 휴전협상 기간 동안 수많은 UN군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원치 않는 전쟁터에서 소모품처럼 죽어나가 이곳에서 한줌 재로 변했을 젊은 넋들을 생각할 때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옥계리 마을공동체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근처에 있는 태풍전망대에 올랐습니다. 태풍전망대는 휴전선과 불과 800m 떨어진 곳에 설치된 전망대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들 사이로 임진강이 유장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산하는 아름답기 그지없는데, 왜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젊은 청춘시절을 허비해야 하는지 생각하니 답답하기만 하였습니다.

 

 

답답하기는 두루미테마파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로 군남홍수조절댐 때문입니다. 여론을 조작하고, 사실을 왜곡해 만든 군남홍수조절댐은 댐의 기능을 상실함은 물론이고, 오히려 두루미 등 철새 서식지를 없애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길에 파주에 있는 적군묘지에 들렀습니다.

 

 

 

초토(焦土)의 시 · 8 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 중략 -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삽십(三十) 리면

가루 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전쟁이라는 광풍에 휩쓸려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누구의 총알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 쓰러져간 이름 없는 젊음들이 잡풀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아까운 청춘의 죽음 뒤에 아군 적군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70년이 다 되도록 풀지 못하는 적대와 전쟁의 그늘이 부끄러울 뿐이지요.

 

 

적군묘지 가는 길엔 흰 으아리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크지도 않은 덩굴에 마치 묘지에 점점이 바치려는 조화인지 한 송이라도 더 피려고 몸부림치듯 흰 으아리꽃이 빼곡히 피어 있었습니다.

 

 

적군묘지를 둘러보는 동안 구상의 시와 반대로 구름은 북서쪽에서 몰려왔습니다. 시신조차 돌려주지 못하는 '적대'가 여전한 이땅의 현실을 슬퍼하는지 비 먹은 바람과 함께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