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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칼럼/다른색안경 끼고 입양보기

모성애 신화 따로, 입양 편견 따로?

 

입양부모들이 아이의 생부모에 대해 분노를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내 아이가 이렇게 소중한데, 이런 아이를 포기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그런 마음 뿐일까?

분노가 사라지지 않는 바탕에는

'낳은 사람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응당 키워야 한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그런 인식에는 사회적 약자로서 미혼모 개개인이 처한 구체적 상황들이 빠져 있다.

아이를 포기하는 미혼모들 중 다수가 해체된 가정과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음을, 

헤아려보지 않는 것이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우리는 모성애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데에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입양을 보낸 미혼모들은

그들이 처한 다양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버린 나쁜 엄마'로 손가락질 받는다.


많은 학자들이 모성애를 분석하고자 애썼고 

본능이거나 문화적 구성물, 아니면 이 두가지의 상호작용이라는 이론들을 내놓았지만 

명확한 결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차가 너무 커서 모성애란 감정을 일률적으로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나의 경험만 놓고 봐도 모성애에 대한 다각도의 해석이 필요할 것 같다.

나는 한 아이를 낳았고 한 아이를 입양했다. 

낳은 아이를 향한 애정은 점진적으로 자라났고, 

입양한 아이에 대해 느낀 사랑은 전폭적인 것이었다.


임신과 출산에 있어 나의 의지가 차지하는 부분은 

아이를 갖기 위한 '계획 짜기' 정도였다.

이후엔 내 몸을 빌어 생겨난 생명이 스스로 자라 밖으로 나오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로선 수동적으로 이 '사건'을 겪는 것에 불과했다.


아이와의 첫대면은 낯설었고, 온전한 사람이라 하기엔 너무나 작고 연약했다.

산후조리원에서 나는 아이의 기저귀 갈아주는 것을 회피했다.

'이런 지저분한 일을 내가 해야 하나?' 라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면서.

모성애라고 말할 만한 감정을 느낀 순간은 한참 후에 찾아왔다.

젖을 물리면서 어느날 문득 길게 자라난 아이의 속눈썹을 봤을 때였다.


입양의 경험은 이와 사뭇 달랐다.

첫대면한 아이의 눈빛은 그야말로 심장을 쿵 울리게 했다.

생후 백일이 지난 시점이라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갖췄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간절히 아이를 원하는 때였기 때문에? 

혹은 엄마 역할을 한번 학습해봤으니까?


입양이 종결되기까지의 과정은 출산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의지가 개입되었다.

입양 후 아이의 기저귀를 갈면서 단 한번도 불결하다 느낀 적 없었고

엉덩이를 씻어주는 내 손바닥에 아이가 재차 똥을 눈 일화는 지금도 떠올리면

사랑스럽고 귀엽기 그지없다.


단순히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모성애가 샘솟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 아이를 원하는 절실함의 정도, 함께 한 시간의 밀도, 사회적인 기대치,

이 모든 것의 총합이 모성애가 아닐까.

그래서 출산 또는 입양이라는 조건보다는 그외의 많은 변수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희생적 어머니상에 대한 모성애 신화를 강화해왔고

도덕적 고정관념에 따라 '어떻게 엄마가 그럴 수 있어?'라는 비판을 일삼는다.

입양을 보낸 생부모를 무책임하다고 비판한다면

내가 입양한 아이는 부도덕과 무책임이 빚어낸 결과물이라는 뜻이다.

모성애 신화는 입양 편견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입양부모 스스로가, 자신들이 생부모를 대신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한

천륜은 피로써만 맺어질 수 있고, 생부모만이 '친부모'라 호명되며

입양부모는 영원히 친권의 대리자로 존재할 뿐이다.


그런 인식이 내 아이를 다시 한번 입양 편견 속으로 내몰고 있지는 않은가?

내 안에 있는 모순을 파헤쳐 봐야 할 것이다.




20150608  글: 디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