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름대로 칼럼/다른색안경 끼고 입양보기

불임이라서 입양했다?


입양가정 전체 통계에서 불임부부가 큰 비율을 차지한다는 이유로

불임을 '흔한 입양동기'라 못박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불임이라서, 유산 되어서, 사별을 해서...

입양은 사연 있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차선책으로 택하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그러므로 연예인 차인표씨처럼 낳은 자녀가 있으면서 입양한 경우에 대해,

칭송(?)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불임이란 말로 입양동기를 묶는 순간 그 안에 들어 있는 다양한 배경들은 무시된다.

누군가에게 결혼한 동기를 묻는다고 가정해보자.

'미혼이라서 결혼했다'는 답을 듣는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출산 동기를 물었을 때 '피임이 불가능해서'라는 답을 듣는다면 어떨까?


불임이라 입양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입양이 성립되기까지 불임은 그에 앞선 상황이나 조건은 될 수 있으나 

전적인 동기라 말하는 건 지나친 단순화다.

사람이 하나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거치는 복잡한 과정에 대해,

생물학적 원인에만 방점을 찍는 오류는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모든 입양의 최종적인 동기는 무엇일까?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아이를 원하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아이가 있고, 그 아이가 자신을 보살펴줄 배타적이며 고유한 손길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이상 어떤 동기를 말할 수 있을까?


입양가족의 대화에서 '엄마가 아기를 낳지 못해서 널 입양했어'라고 말한다면

문제가 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임신할 수 있었다면 입양도 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 되어 

아이의 자존감에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린 자녀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어른들끼리 입양 문제를 다룰 때는 굳이 조심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과연 그럴까?


불임인 어느 한국인 부부가 서구의 한 나라에서 살다가 한국에 잠시 돌아왔을 때

지금껏 전혀 느끼지 못했던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서구에서는, 아이가 없는 부부에게 왜 아이를 낳지 않느냐, 시험관 시술은 해봤느냐고

꼬치꼬치 묻는 일이 없을 뿐더러, 그런 사람은 이상한 취급을 받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선 일상적으로 이런 무례함이 자행되고 있다.

어쩌면 불임의 고통에 있어서 상당 부분이 사회적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결혼을 왜 제때 안 하느냐, 왜 아이를 안 낳느냐, 왜 둘째아이를 안 낳느냐...'

혈연주의에 더하여 소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까지 가세하여 한국 사회에서는 경솔한 말들이 넘쳐난다.

이런 상황이니 불임부부가 설 땅은 참으로 비좁을 수밖에.


입양동기를 분석하고 마음 속에 숨겨진 상실감, 상처들을 찾아서 

치유를 해야 건강한 부모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이 주장이 선의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역설적인 것은, 입양 동기를 분석하면서 불임을 오로지 큰 상처로만 정의하는 것이

혈연주의를 부추길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이를 원해서 입양한 거라는 자연스런 동기는 뒤로 제쳐두고,

입양 동기를 병리적으로 진단, 분석, 치유하는 것에 문제는 없을까?

그런 가운데 '출산은 자연스럽고 입양은 특수한 사람들의 선택'이라는 

고정관념이 강화될 수 있다.

어느 임상심리학자 말대로, 심리학이 심려학으로 바뀌는 대목이다.


위기 상황이거나 양육에 큰 어려움을 느낄 때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은 유익하다.

그러나 불임으로 인한 상실감을 말할 때 과장되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불임이 과도하게 언급되다 보니 '선택적 불임'이라는 이상한 표현도 생겨났다.

'불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녀를 낳는 대신 입양을 택했으니 아름답지 아니한가!'

은연중에 이런 느낌을 주는 말이다 .


'건강한 생식 기능을 가졌음에도 열심히 피임하면서 입양을 선택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우스꽝스럽지 않겠는가?


입양에 대한 불순한 말!말!말!들을 이제는 걷어내면 좋겠다.


 

20150413 글: 디토


다음 이야기: 입양부모라서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