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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칼럼/다른색안경 끼고 입양보기

나는 나의 뿌리를 알고 있다?

나는 나의 뿌리를 알고 있다?



입양부모들이 가끔 하는 말이 있다.

'나 자신이 입양인이었으면 아이 심정을 더 잘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이의 마음을 쉽게 짚어볼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나의 뿌리를  잘 알고 있나?'


부침이 많은 한국 역사를 살펴보면 얼마나 입양이 흔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어느날 내 집 앞에 놓인 업둥이를 받아들여 키우는 일,

갖은 재난 속에 부모 잃은 이웃 아이를 내 자식으로 거두는 일,

이런 일화들을 무수히 많이 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역사다.

선대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입양이 낯선 일이 아닌데

핏줄에 집착하는 현실 속에

되도록 비밀입양을 고수해왔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게 비밀스런 사연이 도처에 있다면

과연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출생 스토리인들 백퍼센트 믿을 수 있을까?

내 부모가 하는 말이니 그러려니 하는 것이지

내가 나 자신의 출생 장면을 목격이라도 했던가?

거칠게 말하자면 누구나 자신의 출생은 그야말로 미스테리일뿐이다.


내가 입양인이면 100% 뿌리찾기를,

내 부모가 입양인이라면 50%만큼의 뿌리찾기를,

조부모가 입양됐으면 25%만큼의 뿌리찾기를 해야 하나?

무슨 산삼뿌리도 아니고 왜 그토록 애타게 찾아야 하는 건지 궁금하다.


입양인의 삶을 식물에 비유해서 생부모를 뿌리라 명명했다면

뿌리라는 말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에 귀 기울여봐야 한다.

식물의 뿌리는 생명의 원천이며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내 아이를 뿌리 없는 식물에 비유한 거라면

앞으로 용어 수정에 힘써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입양인들이 자신의 생부모에 대해 궁금함과 애틋함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뿌리찾기를 하지 않으면 정체성에 심각한 손상이라도 생기는 것처럼 말하

혈연중심주의를 돌아보고 싶은 거다.


얼마전 프랑스에서 병원의 실수로 자녀가 뒤바뀐 것을 알게 되어 

23억원의 보상을 받게 된 기사가 소개된 적이 있다.

이 기사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이 대목이다.

'두 가족은 아이를 다시 바꾸지 않기로 했으며 그 뒤 거리를 두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들을 연락조차 끊게 만들었을까?

기사에 표현된 그들의 심정은 '당혹감,  비통함, 두려움'이었다.

생물학적 어머니의 낯선 모습에서 자녀가 느낀 당혹감,

두 가족이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하면서 느꼈던 비통함,

현재의 가족을 잃을까봐 겪었던 두려움.

'가족이라고 느끼기 위해 피로 맺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이들은 결론 지었다.


한편 뒤바뀐 아이 이야기를 다룬 일본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는

완전히 다른 전개가 이어진다.

진실을 알게 된 가족들은 당연하다는듯 아이를 바꿔서 키우게 되

양쪽 가족은 왕래를 이어가며 다양한 갈등을 겪는다.

그럼에도 결말은 같다. 가족은 핏줄로만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일화들을 두고 동서양의 정서 차이라거나 매우 예외적인 경우로 해석하면 그만일까?

만일 문화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본성'이라면 

그 자체가 얼만큼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가 본성이나 본질이라고 믿는 것들 중 많은 부분이 

미신이나 오해일 가능성을 늘 열어두었으면 한다.


다음 이야기:  불임이라서 입양했다?
20150404 글: 디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