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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칼럼/in교사, 교사 속마음 디비기

[in교사] 믿음 없이 ‘교육’ 될까?

[in교사] 믿음 없이 ‘교육’ 될까?

                                                                                                                            
 꽤 오래 전 일이다. 담임 반 학생 중에 용모도 뛰어나고 부유하며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 있었다. 학기 초 그 학생의 어머니가 상담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 대화를 마치고 돌아갈 때 그분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나의 책상 서랍에 재빨리 집어넣었다. 돌려주려 하자 도망치듯 사라졌다. 나는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사실 이런 금품을 건네는 부모는 많다. 학기 초 아예 가정 통신문을 보내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부탁해도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어떻게든지 뇌물을 전하려 했다. 한 번은 휴일 아침에 늦잠을 자고 있는데 운송 업체에서 전화가 와서 옥돔을 보낼 테니 집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나에게 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름을 듣고 잘 생각해 보니 담임 반 학생 이름이었다. 허겁지겁 다시 전화해서 받을 수 없다고 취소했다. 어떤 때는 학급의 학부모 몇 명이 모여서 식사라도 하자고 불러내어 선물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돈을 직접 지갑에서 꺼내어 서랍에 넣어준 것은, 그때까지 경험했던 학부모들의 수많은 뇌물 전달 방법 가운데 가장 솔직하고 황당한 것이었다. 다음 날 학생 편에 눈치 채지 못하도록 편지로 돈을 싸서 봉투에 넣어 돌려보냈다.

                                                                                     
 그런데, 몇 달 지나서 우리 반 학생들이 그 학생을 따돌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돌리는 아이들을 불러서 그 학생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으면 좋겠다고 설득했다. 어찌됐든 너희는 다수고 그 아이는 한 명이기에 그런 행위는 옳지 않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사태는 매우 심각해졌다. 반 학생들 사이에 나에 대한 몹시 안 좋은 소문이 돌았다. 내가 그 학생의 어머니로부터 돈 봉투를 받았으며, 우리 학교에서 가장 ‘촌지’를 가장 잘 받는 선생이라는 것이었다.
                                                      
                                                      

 학부모가 교사에게 건네는 뇌물에 해당되는 금품이 소위 ‘촌지’라는 명목으로 존재해 왔던 세월은 한국 교육사에서 길다. 故 이오덕 선생은 ‘촌지’라는 표현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그냥 ‘돈’이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건네지는 금품이 교육을 망친다고 했고, 그것을 ‘촌지’라는 말로 미화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임을 지적했다.

                                                                        
 처음 교단에 섰을 때, 동료 교사들에게 이른바 ‘촌지’는 관행이었다. 당시 교감이 ‘담임 시켜 줬는데, 인사를 안 한다’며 교사들을 불러다 놓고 꾸짖는 일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임 교사들은 교감 선생님을 볼 때마다 더욱 깍듯이 인사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말했던 ‘인사’란, 담임으로서 받은 촌지 중 일부를 상납하는 것을 의미했다.
                                                                              
                                                                 
 담임이 되고 나서 나는 촌지를 편지에 싸서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교사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하는 것이 매우 이상한 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동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선배교사가 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나이 든 교사들 사이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고 모난 선생으로 보였단다. 그런데, 그분은 내가 하는 방법대로 촌지를 돌려보내 봤더니, 의외로 기분이 괜찮더라는 것이었다.

                                                    
 그 후 전교조 등의 노력과 시대의 변화로 인해, 대놓고 학부모의 뇌물을 당연시 하는 분위기는 교단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병폐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만 않을 뿐, 나는 교직 생활 내내 학부모가 뇌물을 가져오려는 시도를 막아내기 위해 불필요한 소모전을 펼쳐야 했다. 객관적으로 드러난 자료도 있다. 지난 4월 국무총리실 감사관에 의해 학부모로부터 뇌물을 받은 교사들이 적발되었다. 학부모로부터 50만원 상당의 상품권, 30만원 상당의 선물을 받다가 적발되었다고 한다. 아마 한국에서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부모는 알 것이다. 이런 금품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끈질기게 뇌물을 주고 싶어하는 학부모의 경우는 결국 마음이 상할 만큼 따끔한 의사 표현을 해야 포기한다. 아직도 교사로서 이런 금품을 거절하기 위해서는 ‘모난 사람’, ‘이상한 선생’이라는 말을 들어야 할 만큼 힘들다. 가끔 전체 교사들에게 자주 간식을 내고, 선물을 전하는 학부모들도 있다. 한 사람이 받으면 사소한 것 같지만, 학부모가 지출한 금액은 상당할 것이다.

                                                                 
 나 역시 자녀가 있는 학부모 입장에서 해가 바뀔 때마다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신경을 쓰게 된다. 혹시 돈이나 선물을 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얼마나 주었는가에 따라 아이를 차별하거나 학교생활을 힘들게 할 사람이라면, 그냥 선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이런 마음을 먹는 것은 내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아픈 기억 때문이다. 학급 회장 선거에 친구들의 추천을 받았는데, 담임이 따로 시킬 일이 있다며 후보에서 빼 버렸다. 물론 따로 시킬 일은 없었다. 첫 시험에서 우등상을 받지 못했다. 상을 받은 친구와 성적을 비교하니 내가 더 시험을 잘 보았기에 담임에게 이상하다고 물었다. 일과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있는데, 부반장이 다른 학생의 이름을 지우고 내 이름으로 고친 우등상을 전해 주고 갔다. 이런 일들은 서막에 불과했다. 나는 1년 내내 담임에게 이유 없이 혼나고 괴롭힘을 받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소위 ‘촌지’를 가져오지 못하는 가난한 학부모들을 생각해서 차마 담임의 노골적인 요구에도 금품을 건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어머니가 옳다고 생각했지만, 자라면서 그때의 상처가 생각보다 더 많이 내 삶을 힘들게 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차라리 그냥 그 돈 줘 버리지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학부모 입장에서 담임 교사가 금품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건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자녀를 인질로 잡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인질범에게 납치되었을 때, 부모는 아이만 살릴 수 있다면 돈을 건네고 싶어 한다. 인질범에게 돈을 건네는 것이 더 많은 인질범을 양산한다는 사회 문제를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왜 소위 ‘촌지’의 문제가 교육에 있어서 중요할까?
이런 뇌물을 주고도 교사를 믿을 수 있을까? 그 교사가 주관적으로 써준 생활기록부의 내용이 공정하다고 믿을 수 있을까? 그 교사가 쓴 추천서가 공정하다고 믿을 수 있을까? 그 교사가 낸 수행 평가 점수를 믿을 수 있을까?
 많은 교사가 촌지를 받으며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겼던 우리의 오랜 교육 풍토가 학생 평가의 공정성을 믿지 못하는 현실을 만들었다.

                                               
 대학 입학 전형이 필기시험 위주에서 다양한 평가로 바뀐 것은 문제 풀이 능력과 단순 암기식 평가로 학생의 다양한 능력을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당연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렇게 다양해진 평가에는 교사의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교사의 주관적 평가를 믿지 못한다. 공정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교사의 주관적 평가를 믿지 못하기에 수행평가나 생활기록부 전형, 학교장 추천 등의 제도를 만들어 놓고도 이런저런 제제를 가한다. 수행평가의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라는 까다로운 교육청의 주문에 따라야 한다. 생활기록부의 기록의 세밀한 부분까지 교육부의 지시가 내려온다. 대학에서는 교사가 쓴 추천서가 부풀려진 것을 가려내는 노하우를 연구한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 이 사회가 교사에게 부모의 마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기 아이가 남의 아이보다 잘되고 잘 살았으면 하는 단순하고도 세속적인 욕망을 교사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래도록 교단에 있어왔던 ‘촌지’라는 병폐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이런 반작용도 생겨났다. 교사들은 자신의 주관적 평가가 개입되는 수행평가나 서술형 평가를 하는 것을 꺼린다. 이에 대한 시시비비에 얽히기 싫고, 괜한 오해를 받기 싫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교사를 불신하는 대신 ‘평가’를 맹신한다.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서 학생의 능력을 숫자로 일렬 줄 세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시험을 출제하는 것도 교사이고 채점하는 것도 교사다.  학생의 학업 능력뿐만 아니라 인내심, 탐구력, 이해력, 창의성, 협동성 같은 수많은 능력을 측정하는 것이 객관적인 지필 시험 점수로 가능할까? 그리고 이런 능력들은 한 줄로 줄 세워서 누가 누구보다 못하다는 세밀하고 정확한 성적을 낼 수 있을까?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교사의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사에게 부모의 마음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자기 학교 자기 반 학생들의 ‘성적’과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애쓰는 마음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덧붙여서 교사에게 건네지는 뇌물이 근절되어야 한다.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 이 문제야말로 국가가, 교육부가 강력히 개입해야 한다. 구체적인 교육 내용과 방식과 학사일정, 교육과정을 만드는 것은 단위학교와 교사들에게 되도록 맡기고, 뇌물 근절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무너진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한 정부의 일이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어찌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20150526 글쓴이: 눈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