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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칼럼/in교사, 교사 속마음 디비기

[in 교사] 수박 먹여 주는 교사

[in 교사] 수박 먹여 주는 교사

 

 

 

2010년, 우리 학교에서 진학지도 연수가 있었다. 강사는 <수박 먹고 대학간다>의 저자로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박권우였다. '수박'이란 '수시 대박'의 준말로, 이 책은 전국 122개 대학의 주요 전형 방법을 상세하게 정리한 입시 지도의 경전이라 할 만한 책이다.


강의가 시작되고, 두 개의 생활기록부(이하 생활부) 자료 화면이 빔 프로젝트에 걸렸다. 하나는 우리 학교 전교 1등 학생의 것이고, 하나는 박 교사가 재직하는 학교의 전교 1등 학생의 것이었다. 박교사는 둘을 비교하면서, 우리 학교 학생의 생활부의 맹점을 지적했다. 생활부를 어떻게 작성하는 것이 더 입시에 유리한가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의 노력은 그야말로 헌신적이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분명 학생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복잡한 대학입시 제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위해, 수많은 대학의 다양한 입학 전형을 연구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진학 지도는 상위권 학생들이 진학하는 몇 개 대학에 집중된다. 그러나 그는 중하위권 학생들을 위한 대학 전형까지도 모두 섭렵했다.


거의 모든 학교에서 고3때 입시 지도를 시작하지만, 박교사는 1․2학년 때부터 학생의 희망 진로와 특성을 고려하여 구체적인 입시 지도를 했다. 그는 '수시 대박'이란 말에 걸맞게 각 학생에게 맞춤형 수시 전략을 제시했다. 그래서 진학할 대학에서 원하는 대로 학생들의 생활부를 작성하고 그에 걸맞는 학습과 교내 활동을 하도록 안내했다.


나는 이 강연을 들으며, 공교육 교사가 입시 제도를 연구하는 것에 이토록 힘을 쏟는 것은 낯 뜨거운 일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학생들이 학업을 비롯해 다방면의 실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당연히 교사의 일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의 진학과 진로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교사의 보람이다. 그러나 ‘이런 활동은 입시에 도움이 되니까 해봐라. 특히 이런 것이 반영이 되니까 준비해야 한다’는 시시콜콜한 내용을 연구해서 화려한 생활기록부를 만들어 주는 것은, 엄밀하게 따지면 진정한 ‘교육’과는 무관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전국의 학교로 퍼져 나가면, 경쟁을 위한 경쟁만 더 심해질 뿐이다.

 

고등학교 교사는 정규 교육 과정에 충실한 알찬 교육을 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학생들의 적성에 따라 진학과 진로에 자연스럽게 연결되면 된다. 입시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면, 입시에 도움이 되는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학습을 시켜줄 수는 있다. 그러나 자기 제자들의 좋은 입시 결과를 위해, 대학 잘 가는 요령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교사라면 오히려 학부모와 학생, 그리고 숱한 사교육 기관에서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을 비판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학생들이 이런 요령에 따라 입시를 준비할수록, 입시 제도는 학생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쪽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대학은 어떻게든 학생들을 변별하기 위해 입시 방법을 더욱 복잡하게 하거나, 더 자주 바꾸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그 결과 우리 학생들은 대학의 요구에 따라 복잡한 시험과 스펙을 준비하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원래 초중고 시절은 앞으로의 삶에 필요한 학습 능력과 인성을 길러야 할 소중한 시기인데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와 사회로 볼 때도 불필요한 낭비이며 소모이다.


그래서 나는 이 강연이 불편했다. 강연이 끝나고 몇몇 동료들과만이라도 이런 생각을 나눌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강사가 나간 뒤, 강의실은 감동의 물결에 휩싸였다. 동료들은 일제히 박교사를 칭찬했다. 박교사에게는 ‘참교육자’라는 찬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최근 나는 혁신학교의 사례를 소개하는 저서를 읽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박교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찬사에 접했다.


⌜3학년 담임을 하던 2009년 가을 숙명여대에서 열린 박권우 선생의 입시설명회에 참석했다. 인천 숭덕여고는 전입 대기자가 있을 정도로 지역사회로부터 평가가 높은 일반고였다. 그는 설명회에서 전교생이 야간 자율학습을 하며 다양한 학교 활동을 하는데 활동 모습을 학교 생활기록부에 상세히 기록할 수 있어서 진학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독서 활동 일지 한 쪽을 내면 학생부에 100자 정도를 기록했는데, 250권을 읽은 학생이 서울대 국문과에 합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주었다. 학부모의 경제력이 낮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서울대 등 주요 대학에 50여 명, 그리고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에 150 명을 합격시킨다는 사실을 들으면서 등골이 서늘해지고 심장이 뛰었다. 입학사정관제로의 전환이야말로 그렇게 찾아 헤매던 대안이었다. 그것만이 대학 입학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일반고 리모델링, 혁신학교가 정답이다’ 중에서)

 

아끼는 학생들이 원하는 대학에 가기를 바라는 것은, 교사의 자연스러운 마음일 지도 모른다. 대학이 심하게 서열화되어 있고, 직업간 임금 및 근무 여건의 차이가 큰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교사는 부모와는 다르다. 자신의 학교, 담임 반,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 그 중 몇 명이 잘되는 것을 위해 애쓰는 게 교사의 사랑일 수는 없다. 교사라면 공교육에 대한 국가 차원의 고민까지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게 교사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복잡한 입시 제도와 무한 경쟁의 고통을 겪게 한 데는, 교사와 학교에도 책임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공교육 교사들이 작성한 내신 성적과 추천서가 믿을 만한 것이었다면, 입시 제도가 이렇게 복잡해졌을까? 동학년 전체가 한날 한시에 치르는 엄정한 정기고사를 치루지 않고는 신뢰할 만한 내신 성적을 산출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외국처럼 교사의 추천서와 기본적인 교내 활동 서류만으로 대학 입시가 불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나라들의 단순한 대학 입시 제도를 부러워 하고 입시 지옥이 없는 곳으로 교육 이민까지 가야 하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공교육 교사가 자기가 가르친 학생들이 경쟁에서 승리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면, 적어도 이런 병폐는 생기지 않았으리라.


학생들을 좋은 대학에 입학시켜 어떻게든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힘쓸 것이 아니라, 직업에 귀천이 없으며, 없어야 하는 것이고,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가 사람의 수준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고 있는 현실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치는 게 우선되어야 했다. 적어도 사회 전체가 미쳐 돌아갈 때, 교사와 학교는 ‘공화국의 평등 정신’을 지켜 나갔어야 하지 않을까?


한때 내신 경쟁 과열로 학생들의 인성이 파괴되고 학교 교육이 파행을 겪자 내신을 절대평가로 전환한 적이 있었다. 당시 우리 학교 교감 선생님이 직원회의에서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시험을 쉽게 출제해서 90점 이상 학생을 다수로 만들어 달라고. 그리고 얼마후 학교들의 고교 내신부풀리기가 언론에 일제히 보도되었고, 절대평가는 폐지됐다.


학생들의 고통을 누가 만들고 있는가?
대학이 고등학교 교사들의 추천서를 어느 정도 신뢰할까? 대학에서는 지나치게 부풀려진 추천서를 가려내기 위한 노하우까지 연구하고 있다.


박교사의 강연이 인기를 끌수록 학생들의 생활기록부 부풀리기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를 막기 위해서 교육부에서 생활 기록부 기록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약을 만들어 각 학교로 내려 보낸다. 교내 봉사활동이 부풀려지자, 일과 중 봉사활동은 기록하지 않도록 하거나, 아예 봉사시간을 줄 수 없는 활동을 지목해서 내려 보낸다. 동아리나 자치 활동이 부풀려지자, 쓸 수 있는 글자수를 제한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는 교사가 엄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 아이만이라도 어떻게 해서든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부모의 심정과 교사의 입장은 달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공교육 교사들에게 이런 부모의 입장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한다. 다 같이 지옥에 빠지는 길이다.


박교사는 그의 저서, <수박 먹고 대학간다> 서문에 이렇게 썼다.

 

⌜부쩍 늘어간 학생들의 수시에 대한 관심과 질문에 대응하고 준비시키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대학 입시가 이해되고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고 ‘절대로’ 된다, 안 된다는 표현은 하지 못 하고 ‘확률적으로’만 말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대학 입시는 아무리 노력해도 예측할 수 없는 외부 변수가 너무 많은 ‘살아있는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서문을 읽으며 참 안타까웠다. 수업과 학생 지도에 쏟아야 할 교사의 귀한 노동력이, 사교육자들이 매진할 만한 일에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행위는 사회 전체로 보아 모순을 심화시키는 데 일조하기에 더 심각하다.
그러나 더 걱정스러운 것은 교사들이 그런 일에 매진하고 있는 현실보다도, 그것이 교사의 마땅한 의무라고 인식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통념이다.
이런 통념 때문에, 생활부의 기록에 학생과 학부모가 노골적으로 개입해서 이런 저런 요구를 해오는 현상도 벌어진다.


박교사는 또 이렇게도 썼다.


⌜1등부터 중하위권 학생들까지 한 명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서울 주요 대학부터 통학 가능한 지방 대학까지 각 전형들의 특징과 지원 가능 성적 등을 한 권에 담아야 하기 때문에 분량이 방대합니다.⌟


입시 전형을 연구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정말 희생에 가까웠다. 많은 이들이 필요로 하는 일이기에 박교사는 해마다 사적 삶이 불가능할 정도로 헌신하며, 수많은 대학의 입시 전형을 연구하고 책을 집필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원하는 교사상이 ‘수박 먹여 주는 선생님’에 머물러 있는 한, 한국의 학생들은 그저 입시 기계가 되어 무의미한 학습 노동에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 진정한 학습 능력보다 입시 요령과 문제풀이 기술만을 익히며 무한 경쟁으로 시들어 갈 수밖에 없다. 한국의 기성세대는 진정 학생들을 사랑하는가? 수박 먹여 주는 사랑이 사랑이기나 할까?

 

 

20150519 글: 눈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