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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칼럼/in교사, 교사 속마음 디비기

[in 교사] 맹모는 열녀, 강남 엄마는 맹모

 [in 교사] 맹모는 열녀, 강남 엄마는 맹모

 

 


 연대 미상의 한글 필사본 <열녀전>, 이 책에는 맹자의 어머니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옛날 맹자(孟子)의 어머니가 묘지 근처로 이사를 갔는데 그 때에 맹자 나이 어려 보고 듣는 것이 상여(喪輿)와 곡성(哭聲)이라 늘 그 흉내만 내므로 맹자의 어머니는 이곳이 자식 기를 곳이 못 된다 하고 곧 저자 근처로 집을 옮겼더니 역시 맹자는 장사의 흉내를 냈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곳도 자식 기를 곳이 아니라 하고 다시 서당(書堂) 근처에 집을 정하니 맹자가 늘 글 읽는 흉내를 내므로 이곳이야말로 자식 기르기에 합당하다 하고 드디어 거기에 안거(安居)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맹모가 극성스런 사람이라고 생각 하게 됐다. 이사까지 해가며 공부시켜서 자식이 출세하길 바란 건 아닐까? 현대의 한국에 맹모가 살았다면, 자녀를 위해서 원정출산이며 위장전입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기 아들이 상업이나 죽음에 관련된 직업에 종사할까 걱정했을 듯하다. 그런 맹모에게서 민본주의 사상가 맹자가 나온 것은, 그나마 어려서 화장터와 저자거리에서 삶과 죽음을 배울 기회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 이야기의 출전이 <열녀전>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열녀의 탄생>(강명관, 2009년)이란 책에 의하면, 조선의 양반들이 여성을 철저하게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 만드는 과정에서 <열녀>라는 가치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속화 과정은 <열녀전>과 같은 책을 비롯해서 조선의 법과 제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열녀의 탄생>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장구한 의식화 작업의 결과, 임진왜란 이후 수많은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자신을 정의했으며, 성적 종속성의 실천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것을 여성 고유의 윤리 실천이라 믿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조선 여성의 자아실현이란 자녀와 남편을 통한 대리만족을 의미했다. 자신의 삶이 아닌 남의 삶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도는 왜곡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철저히 자신을 지우고, 타인의 삶을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하는 존재인 열녀. 그런데 21세기 한국에는 아직도 이런 열녀의 망령이 도사리고 있다.

 많은 한국의 어머니들이 조력자나 조언자를 넘어서 자녀의 삶을 좌우하려 들고, 때로는 거의 대신 살다시피 한다. 물론 이는 한국 사회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심각하게 서열화된 대학, 사회 양극화, 고용 불안정 속에, 자녀의 미래가 불안한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이렇게 자녀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사랑’이라 미화하는 사회적 통념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열녀’라는 가치와 맞닿아 있다.


 전체 교직원에게 종종 간식을 내는 학부모가 있었다. 나는 그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많은 선생님들은 자녀를 위한 그 어머니의 마음을 ‘정성’이라며 칭송했다. 이런 엄마들은 그래도 평범한 편이다. 자녀가 다니는 학원에서 중등 과정의 공부를 같이 하거나, 영어 교육을 위해 필리핀 등으로 함께 출국하기도 한다. 자녀의 봉사활동이나 체험활동을 대신하거나, 학교에 방문해서 교과목 선생님들에게 생활기록부에 좋은 이야기를 써달라고 요청한다. 또 담임이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옆에 앉아 함께 하는 꼴불견을 빚는 경우까지 있다.


 열녀란 좁은 의미로는 생명을 던져 지아비에 대한 절개를 지킨 여성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맹모처럼, 아들 교육을 위해 자신을 삶을 바친 사람이나 남편을 현명하게 조력하고 희생한 여성까지 의미한다. 그래서 맹모의 이야기의 출전이 <열녀전>이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에서 맹모는 한낱 미담 속의 인물이 아닌,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실체다.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나 추모공원 설립에 맞선 주민들의 반대 논리 속에는 항상 자녀 교육문제가 포함된다. 자신의 자녀가 장애인을 흉내 낼지도 모르고, 화장장 부근에서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다분히 ‘맹모’와도 같은 우려를 내세우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민주 평등을 지향하는 공화국의 국민으로서 부끄러운 일이건만, 자녀교육을 내세우는 이들은 매우 당당하다. 이런 당당함의 바탕에는 ‘자식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고, 그 사랑은 절절하기에 신성하다’는 모성애 신화, 열녀의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2009년 우리 학교에 부임했던 교장은 TV 토론에 나가서 이런 말을 했다. “저는 강남 엄마들을 존경합니다. 그분들은 맹모와 같은 분들이십니다.”

 얘기 방향은 달랐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일치하는 말이었다. 맹모는 ‘강남엄마’의 모델이다.

 

 몇 해 전 11월이었다. 수능 시험 며칠 전부터 학교는 한바탕 북새통이 된다. 시험장이 될 학교를 청소하고 세팅해야 하는데, 그 준비는 실로 1년 치 스트레스를 쏟아 부을 만하다. 준비과정에서 전체 교직원회의도 몇 차례 하는데, 그때 교감 선생님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내 아이가 이 시험장에서 시험을 치른다는 생각으로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교사는 공무원이고 수능 시험이 국가적인 의미를 갖는다면, 가장 공정한 감독이 될 수 있기에 시험장을 준비하고 검토요원이나 감독관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준비를 위해서 자기 자녀를 떠올려야 할까? 그냥 교사로서의 책임감에 호소해야 하는 것 아닌가?

 흔히 교사에게 부모의 마음으로 학생들을 대하라고 한다. 우리는 종종 부모가 자녀의 삶에 개입해서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아름다운 모성애와 혼동한다. 그러다 보니 현대판 열녀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온갖 편법을 불사하는 것까지도 동경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미화하며 교사에게까지 요구한다.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사랑인 듯이.


 그 결과 생활기록부의 기록을 유리하게 써주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교사를 원망하거나 정정을 요구하는 학생, 부모, 교장이 생겨났다. 그러나 교사는 부모가 아니다. 민주공화국의 교육을 책임진, 따라서 공정성과 엄정함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공무원이다.


 혹자는 맹모가 진정한 교육자라고 한다. 맹자가 세상을 고루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 묘지와 시장, 마지막으로 서당 옆으로 이사해서 자녀 교육을 완성했다고 미화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출전이 열녀전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녀는 철저히 자기 삶을 지우고, 남편과 자녀에게 종속된 삶을 살았던 조선 열녀의 모델이었다.

맹모의 극성을 미화하고, 그것이 교육의 왕도인 양 찬양해서는 안 된다. 교사들에게 그런 부모 마음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수백 년 전의 열녀의 유령, 맹모가 21세기 한국 교육에 드리우고 있는 깊은 그늘을 이제는 걷어내야 한다.

 

20150602 글쓴이:눈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