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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칼럼/in교사, 교사 속마음 디비기

[in교사] 사랑이어도 안 괜찮아

[in교사, 교사 속마음 디비기] 사랑이어도 안 괜찮아


떠올리기에도 부끄러운 기억들이 있다.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에 대한 기억도 그 중에 하나다. 선생님은 우리들을 하나하나를 정말 사랑하셨다. 어린 나이이지만, 우리 반 아이들은 선생님이 우리들의 활기, 호기심, 웃음을 귀엽고 예쁘게 여긴다는 걸 알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웬일인지 나는 그 해의 첫 시험을 무척 잘 봤다. 담임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눈에 띄는 신뢰와 기대를 보내셨다. 다음 중간고사 영어시간에 담임선생님이 감독으로 들어오셨다. 영어선생님이었던 그분은 내 시험지를 자주 들여다보셨다. 그리고 시험 도중에 말씀하셨다. “이 녀석들 묵음되는 철자를 빼고 써?” 나는 얼른 고쳐 썼다. 내 얘기가 아닐 수도 있었지만, 나에게 주시는 힌트라 생각했다. 잠시 후 선생님은 결국 내 자리에 와서 그것 외에도 내가 잘못 푼 문제를 가만히 손으로 짚어 주셨다. 그때 나는 선생님이 좋았다. 인정받고 사랑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부끄럽지만, 지금도 선생님이 나쁜 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 만큼 성장기에 어른으로부터 받은 그런 사랑은 달콤하다.

그리고 현재 우리 사회가 교사에 대해 갖는 기대치는 여전히 그때 선생님이 하신 행동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2002년 고교 내신 절대평가가 시행되었다. 얼마 후 직원회의에서 교감선생님이 당부하셨다. ‘시험을 쉽게 출제해서 90점 이상 학생을 늘려 달라’는 얘기였다. 그 후로도 이런 일은 학교 차원에서 자주 일어났다. 예체능과 선생님들을 따로 불러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예체능 실기 점수를 잘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결국 ‘내신 부풀리기’가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절대평가제는 폐지되었다. 단순히 한 두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신등급제가 시행되어도 마찬가지였다. 서울대 합격생을 많이 내기 위해서 내신 절대강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전 과목 1등인 한 명의 최우수 학생이 나오는 것이, 여러 명의 우수 학생이 경쟁하는 구도보다 입시에 유리하다고 했다. 고루 우수해하면 상대적 성적이 함께 나빠질 수 있으니 시험 난이도로 섬세하게 조절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와중에 학부모들이 교무실에 와서 ‘우리 아이가 왜 그 과목만 점수가 나쁘냐? 그 선생 때문에 명문대를 못 갔다’고 따지는 일들도 있었다.

직원회의에서는 입시가 바뀔 때마다 이런저런 방도가 논의되었다. 각종 외부 경시대회와 교외 상 수상이 입시에 반영되어 엄청난 파행이 일자, 교육부는 학교생활기록부에 교외 수상을 적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자 입시에서 교내 수상 내역이 중요해졌다. 각 학교에서는 발 빠르게 교내 상을 많이 만들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상을 주는 것으로 대응했다. 학급 회장을 한 번만 해도 입시에 유리하므로 1,2학기 회장을 따로 뽑고 되도록 중복해서 하지 않도록 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한번은 졸업사정회 때 전교조 분회원이었던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학부모가 학교에 봉사하시는 경우 그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그 자녀들에게 상을 주자.’

생활기록부가 중요해지기 시작하자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교사의 생활기록부 작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요구사항이 많아졌다. 심지어 전교 1등 학생의 학부모가 담임의 옆 자리에 앉아서 함께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진풍경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자주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 좋은 대학에 합격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실력이 되는 만큼 합격했으면 좋겠다. 다른 학교 학생들이 더 우수하고 학구열이 높다면 그 친구들이 더 많이 진학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학생들은 야유를 보내기도 했지만, 뭔가 생각해 보는 눈치이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이런 농담은 불가능해졌다. 더 이상 이런 말을 하기에도 어려울 만큼 ‘교권’이 추락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다 보면 동료교사를 욕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 선생님은 생활기록부도 무성의하게 써줘요. 내용이 한 페이지도 안된다구요. ”

“저는 000 선생님이 담임이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생활기록부를 잘 써주신대요. 000선생님도 좋긴 하지만, 그렇게 잘 써주지는 않는대요.”

이런 와중에 내겐 지금도 떠올리면 부끄러운 기억이 또 하나 있다. 선생이 되고 난 뒤의 일이다. 가끔 학생들 중에 유난히 코드가 맞는 친구가 있다. 굉장히 똑똑하고 성실하면서도 학교에서 반 친구들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는 매우 논리적으로 따지고 드는 학생이 있었다. 함께 얘기하면 눈부신 그 친구가 참 좋았다. 그 학생이 고3이 되어 나에게 찾아왔다. 대입 자기소개서를 쓰는데, 봐달라는 것이다.

2학기가 시작되면 고등학교 교무실은 만원이다. 국어선생인 나는 특히 많은 학생들이 자기소개서(이하 자소서)를 들고 와서 잘 썼는지 봐달라고 했다. 나는 이 일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 소개서를 교사들이 봐주는 것 자체가 그것의 변별력을 잃게 한다. 자기 학교 학생들이 대학에 잘 붙기를 바라는 마음에 많은 교사들이 자소서를 첨삭해 주지만, 그것은 원론적으로 공정하지 않고 옳은 일도 아니다. 그걸 알고 있으나, 현실론에 밀려 나 역시 문장이나 표현 정도를 봐주긴 한다.

그런데, 그 친구의 자소서를 더 잘 써주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나는 원서 접수 마감일까지 학생과 메일로 파일을 교환하면서 첨삭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만큼 정말 많이 수정해 주었다. 담임이 추천서를 성의 없이 써 줬다고 나에게 불만을 털어놓는 이 친구에게 나는 그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해주지 못했다. 이것이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그 친구가 선생인 나를 좋아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다들 입시제도가 문제라고 한다. 기계적인 암기나 문제풀이가 아닌 협력이나 문제 제기 능력, 기획력, 탐구력 같은 것을 평가하려면, 필기시험으로는 불가능하다. 고교 내신으로 해야 하는데, 교사와 학교의 이런 행태 때문에 내신을 신뢰할 수 없다. 나는 이것이 입시제도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교 교사가 평가권자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자기 학교 학생들을 대학 보내기 위한 편법을 그만둔다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자기가 가르친 학생들을 서울대나 수도권 대학에 보내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교사가 있는 한, 그런 사랑을 요구하는 학생과 학부모가 있는 한, 제로섬 게임인 대학 입시는 그 제도가 어떻게 바뀌든 여전히 고통과 파행일 수밖에 없다.

공교육 교사는 내가 가르친 학생을 좋은 대학에 합격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그런 사랑을 하면 안 된다. 공교육 기관인 학교 역시 명문대 합격자 명단이 적힌 플래카드를 교문에 붙이고 홈페이지에 선전해서는 안 된다. 학생과 학부모가 그 노골적인 욕망을 마음껏 드러내며 당당히 요구할 때, 그들을 꾸짖어 돌려보내야 한다. 그게 교권이다. 교사는 공무원으로서, ‘평가자’로서 공정성과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체벌 못하게 했다고 교권이 떨어지는 게 아니다. 선물 좀 받았다고 신고 당하는 세상이 이상한 게 아니다. 고등학교 교사가 써준 추천서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대학이 고교 내신을 믿지 못하는 상태가 교권의 실종이다. 무한 경쟁의 수렁으로, 이기심의 지옥으로 학생을 몰아넣는 그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오면서 우리는 그걸 사랑이라고 말해왔다. 정말, 안 괜찮은 사랑이다.


20150113 글 : 눈보라(전직 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