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교사] 보충수업 잔혹사
고등학교 교사로 출발한 나의 교직 생활을 돌이켜 보면, 싸워보기도 전에 패한 자의 삶이란 생각이 든다.
교단에 처음 섰을 때,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보충수업(방과후 수업)이었다. 보충은 정규 수업 시작 전이나 끝난 뒤 0교시와 7,8교시에 진행됐고 방학 중에도 계속됐다. 학생들을 하나라도 더 가르쳐 원하는 대학에 합격시켜 주고픈 교육적(?) 열망을 이해한다손 쳐도 이 수업을 강제하며 수업료를 받는 것이 너무나도 부도덕하게 여겨졌다.
정규직으로 일하게 된 학교에서 첫 해에 바로 담임을 맡았다. 이미 임시직으로 있으면서 학교의 어두운 면을 경험했고, 당시는 조금만 부조리를 거부해도 바로 빨갱이로 낙인찍히는 시대였기에, 새로 간 학교의 첫 1년은 죽었다 하고 지내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학기 초 학생들에게 나눠준 한 장의 가정통신문에서 그 다짐은 무너졌다. ‘보충수업 희망조사서’, 보충수업 참여 여부를 O X 로 표시하여 회수해야 하는 가정통신문이었다.
우리 반 학생들의 희망 조사서에는 당연히 O와 X가 모두 존재했다. 연구부장 선생님의 호출이 있었다. “이 X를 한 명 한 명 불러서 설득해서 O로 만들라”는 하명이 떨어졌다. 전교에 X는 우리 반에만 존재했다. 나는 분노를 누르며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교장 선생님의 겨울방학 보충수업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풀가동의 원칙’으로 하시겠다고 했다. 무슨 얘기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겨울 방학 시간표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 15일 동안 하루 5시간, 총 80시간의 보충 수업을 모든 국영수 선생님을 ‘가동’하여 하도록 한 것이다. 나의 보충 시간표 역시 한 시간의 공강 없이 5시간 씩 총 80시간으로 짜여졌다. 나는 연구부장 선생님께 갔다. “이 시간표는 비교육적이고 부도덕합니다. 수업의 질은 어떻게 되지요?” 그때 내 교직 인생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한 마디를 들었다. “질이 안 되면 양으로 때울 수 있는 거죠.” 기막힌 양질 전환의 법칙이었다.
당시는 학생들에게 받은 보충수업비 중 적지 않은 부분을 교장 교감이 관리 수당으로 챙기던 때였고, 교장 교감 선생님이 보충수업을 강력히 추진하는 배경에 그 돈이 있다는 얘기가 있었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 그 돈 몇 푼에 교장 교감선생님이 연연하는 걸까?” 나의 선배는 대답했다. “쉽게 생기는 그런 돈이야말로 몇 푼이든 달콤하고 뿌리치기 힘든 거지.”
이듬해부터 나는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보충수업 희망조사서에 학생들의 X를 고치지 않았다. 나는 국어 선생이다. 내게는 ‘희망’의 낱말 뜻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다른 선생님들을 설득했다. 어쨌든 우리 반의 영향으로 다른 반 학생들도 강제 보충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꽤 생겼다. 당시는 매우 순진했으므로 내가 옳기에 설득하면 모두 동의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교조 후원회원이었던 동료 교사에게서마저 ‘그 해의 학생들이 1학년 때 강제로 보충수업을 하지 않아서 졸업 당시 입시율이 나빴다’는 성토를 듣기도 했다.
1994년 여름은 정말 무더웠다. 섭씨 40도가 넘는 더위 속에 에어컨도 없는 교실에서 50명 학생들이 보충수업을 했다. 주변의 한 여자 고등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이 물주머니를 머리에 얹고 수업을 하는 모습을 전하기도 했다. 결국 일주일 남짓 살인적인 보충수업이 진행된 후 김숙희 교육부 장관의 요청으로 보충수업은 중단되었다.
이런 보충수업 강제 행위는 김대중 정부 때 잠깐 주춤했다가 계속되었다. 그때 나는 교육부 게시판에 이런 글을 썼다.
‘보충수업이 정말로 학생들에게 필요하다면, 그래서 그것을 국가가 해주어야 한다면, 방학을 폐지하고 정규 교육 과정 안에 보충수업을 넣어라. 따로 돈 받고 강제하는 행위를 더 이상 하지 말라’
보충수업이 정말로 입시 교육에 효과가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일과 수업 중에 지겹게 만난 교사와 학생이 다시 그 교실에서 똑같은 방식의 수업을 하는 것이 학력이란 걸 신장시키기는 하는 걸까? 정규 수업 시간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들까지 강제로 남겨서 돈 받고 그 수업을 해야 하는 걸까? 강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 동료 교사들은 한 두 명 빼주다 보면 다 무너져서 분위기가 와해돼 버린다고 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서 하는 아이들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회의 때마다 강제 보충수업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답변이 있다. 내가 보충수업과 입시 성적이 상관관계가 있다는 확실한 데이터도 없는데 강제하는 게 옳지 않다고 한 말에 대해, 당시 교감 선생님은 답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이다. 지금 한 보충 수업의 효과가 당장 내일 나타는 게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교육의 효과는 확인할 수 없다.” 궤변이었다.
교사들은 끝내 보충수업을 포기하거나 문제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었다. 인터넷으로 해당 교사가 보충 강좌를 개설한 뒤 학생들이 신청하게 됐다. 그러자 세태한탄을 하는 교사들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보충도 학생들이 선택해서 편한 것만 듣는 세상이 왔다.”는 것이다. 학교와 교사들은 이런 와중에도 강제 보충의 향수를 버리지 못했다. 선택은 할 수 있었지만, 몇 개 이상의 강좌를 들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한 번은 방학 보충수업 신청이 끝나고 학년 담임 회의가 소집되었다. 나이 드신 선생님들이 개설했던 수학 과목이 모조리 폐강됐다. 학생들은 젊고 유능한 기간제 선생님들의 사회, 과학 과목으로 몰렸다.
교장선생님이 돌아가며 이 상황의 이유를 담임들에게 문초하셨다. 교장, 교감, 부장 선생님들의 생각은 학생들이 어려운 과목과 무서운 선생님을 피해갔다는 것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말했다. “저는 학생들이 몰린 과목의 교사들이 학생들과 코드도 잘 맞고, 매우 잘 가르치며 유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의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교장선생님이 되물으셨다. “그럼 폐강된 과목은 그 반대란 말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나는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나는 되도록 보충 수업을 맡지 않으려 거부했다. 그러면 동료 선생님들이 덤터기를 써야 한다는 비난이 돌아왔다. 그분들은 보충수업을 하고 싶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할 수 없으니 내가 함께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보충수업이 아닌 학생들과 자발적인 독서논술 수업을 만들기 시작했다. 국어 선생님들은 논술수업을 하면서 비싼 수업료를 받았고, 첨삭비까지 챙기셨다. 옆에서 무료로 하는 내가 고와 보일 리가 없다.
이런 말로 설득하는 분도 계셨다. “선생님은 여자니까 그렇지만, 남선생님들 같은 경우 가장인데, 교사 월급만으로 생계를 꾸리고, 자신의 자녀들을 학원을 보낼 수 없으니 보충 수업료를 받는 것은 그분들에겐 절실한 문제 아닌가?” 한 마디로 나의 보충 수업에 대한 문제제기는 ‘배부른 자의 소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말들이 자연스럽게 주류의 의견이 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게 정말 슬펐다.
최근에는 선택식으로 많이 바뀌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학교에서 강제로 시키는 관행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2008년에 우리 학교에서는 강제로 보충 수업을 하게 하기 위해서 일과 끝난 뒤가 아니라, 보충수업이 끝난 뒤 담임이 종례를 하도록 했다. 나 역시 할 수 없이 강좌를 맡았다. 강좌가 끝나는 마지막 시간에 학생들에게 물었다.
“내 수업을 원해서 선택한 게 아니라, 강제로 남기니까 할 수 없이 선택한 학생들은 솔직하게 손을 들어 봐라.” 주춤주춤 절반이 조금 못 되는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지금 이 학생들에게 돈을 돌려주마.” 아이들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나도 손 들 걸.”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는 수업을 들은 모든 학생들에게 돈을 돌려줬다. 학생들과 나의 관계를 유린하는, 교사의 자존심을 더럽히는 ‘돈’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정말 마음은 날아갈 것 같았다.
그해 겨울 방학, 어쩔 수 없이 또 보충 강좌를 개설해야 했다. 7 명만 받겠다는 나의 논술 수업에 부장 선생님은 16명을 설득해서 신청하게 했다. 첫 시간 나는 “꼭 할 사람 아니면 나가라. 논술은 강의식 수업이 될 수 없다.”라 말해주었다. 연구부장의 설득에 지쳐서 강제로 동그라미 쳤던(돈만 내고 안 나올게 뻔한) 아이들 7명이 우루루 빠져나갔다. 나는 그게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 안했다.
그런데, 그 부장선생님은 나와 독대를 요청하셨다. 길고 긴 설득이 이어졌다.
부장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편하려고만 하십니까? 힘 들어도 16명을 다 시켜야 합니다! 논술이 중요한데 겨우 설득해서 하도록 한 아이들을 다 빼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학생 수가 줄어 수강료가 올라가면 애들이 또 나가려 할 겁니다. 폐강되면 어떻게 할 겁니까? 나도 1학년 심화반 17명을 (강제로)하고 있어요. 게다가 논술은 강사료 외에도 첨삭료 만원을 추가했어요.”
내가 대답했다. “방학 중에도 월급 받으니 강사료를 깎아주십시오. 저는 무료로 한 적도 있습니다. 논술학원은 7명을 넘기는 법이 없다는데, 논술학원 선생보다 못하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습니다. 강의식 수업으로는 논술을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애들 앞에 당당한 선생이고 싶습니다.”
“당신만 깎아주면 어떻게 합니까? 다른 사람들은 뭐가 되는 거죠? 학기중 보충 수업에서 애들에게 돈을 돌려 줬다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가운데 참을 수 없는 건 부장선생님이 아니었다. 나의 비굴함과 머뭇거림과, 스스로가 뭔가 잘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알 수 없는 고민들이었다.
드디어 연구부장은 고개를 들고 나의 폐부를 찌르는 명대사를 날렸다. '세상이 모두 정의롭게만 돌아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의 신념에 찬 눈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 애들에게 불의를 가르치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너……. 바로 나, 나는 부적격 교사였던 것이다. 그 말을 하는 그의 당당함이 나의 심장을 멎게 했다. 그의 당당함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서 주류의 꿋꿋함을 보았다. 그것은 차라리 아름다웠다. 나의 비굴함에 비해.
그래서 나는 알았다. 내가 이 사회 소수자라는 것을……. 양심(?이라 말하기에도 너무나 구차한)적 소수자라는 것을……. 이제 이런 문제로 더 이상 바보처럼 괴로워하지 않기로 했다. 오전에 한 수업이 생각났다.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물었다.
'우리 중 누가, 자신의 이기심과 생존 욕구를 위해서, 한 순간 잔인한 결단을 할 수 있는가? 또 우리 중 누가 부조리한 폭력 앞에서 그건 잘못 됐다고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말할 수 있는가? ……주인공의 아픔이 보이는가? 끝없이 극단 사이를 오가며, 번민하며, 망설이며, 두려워하며, 그러면서도 한발 한발 양심의 소리를 향해 조금씩 발걸음을 내딛는…… 병신과 머저리, 바로 우리들의 얼굴이 아닌가?'
(다행히 아이들은 이 수업에서 나의 열변을 좋아해 주었다. 순수한 그들과 나의 진심이 만났다.)
그래……. 동성애자들의 부당한 고통과 외로움을 뼛속까지 느껴보자. 그들의 용기를 백 분의 일만이라도 빌어보자. 나도 커밍아웃한다. 이 사회 소수자로…….
보충 수업을 잘 하시는 선생님들 중에 정규 수업시간에 자신의 보충수업을 들으라는 얘기를 계속하는 분들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수업 시간에는 열강하지 않고 보충 수업만 열강하는 분도 있다고 했다. 믿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현직 교사의 과외를 금지하는 것처럼, 현직 교사의 보충 수업을 금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공무원으로서 교사는 정규 수업과 학생 지도에 충실해야 한다. 보충 수업이 꼭 필요하다면, 방과후 수업 인력풀을 따로 돌려야 한다. 교사가 방과후에도 수업 보충이나 학생지도를 해야 한다면, 그건 무상으로 이루어지거나 초과근무 수당으로 지급되면 된다. 그래야 일과 중의 질 높은 노동이 보장된다.
20150119글: 눈보라(전직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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